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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l Feb 23. 2018

도시서점 개점기

2017년 8월, 도시서점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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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취향이 희미한 피처 에디터였다. 앞 문장은 이제 취향이 뚜렷해져서가 아니고 더는 피처 에디터가 아니라는 뜻에서 과거형을 썼다. 어쨌든 그게 고민이었다. 다른 에디터에 비해 늘 더디고 무딘 데다 새로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도, 더 잘하고 싶은 노력도 미약했던 것 같다. 경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몰라 묵묵히 따라가려고도 해봤지만, 그러기엔 지금까지의 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라고 결론지으면 미련이 있어도 끊어버리는 나를 말이다. 책 속의 크레딧이 짓누르는 부담은 점점 벅찼고, 동시에 무기력해지는 내 모습은 함께 취재하고 책을 만드는 동료 에디터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았다. 분명히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을 거였고, 그런 사람이 내 자리에 있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2016년이 끝날 즘이었나, 그리고 조마조마한 2017년이 되었다. 새해를 맞아 어반라이크 35호를 끝으로 에디터를 하지 말자는 계획을 정했다. 그 뒤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작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며 지내고 싶었다. 한 달에 월세를 내고 이발을 할 수 있을 정도만 돈을 벌고 책을 읽으며 살면 좋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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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서서히 옅어질 때쯤 어반라이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35호의 주제는 ‘나의 문구 My Stationery’로 유행보다는 유서에 주목하는 주제였다. 문구에 애착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잘할 수 있음 직한 주제였던 것 같다. 편집장님은 이번 기회에 나를 문구 전문 에디터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인지 그 말이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장난 같은 다짐은 약속된 듯이 이루어진다. 잡지를 만들며 수백 가지의 문구를 만났고, 문구를 사랑하는 수십 명의 사람과 세계 곳곳의 문구점을 인터뷰하고 글을 썼다. 덕분에 나는 가장 많은 칼럼에 참여한 에디터가 되었다. 조금 거칠게 말해서 내게 문구에 대한 관심을 일방적으로 주입한 어반라이크 35호는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게 제작되어 3월에 발간했다. 유종의 미라면 그러했다. 이제 에디터를 그만두는 일만 남았지만, 몇 번을 서슴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길이 생겨날까 싶어 며칠을 안고 있었다.

3  

몰입을 이끄는 소설이나 드라마의 극적인 전개는 대개 필연이지만, 그것을 실제 삶에서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극적인 전개가 내게 다가왔다. 눈앞에 보이던 새 길은 어반북스의 공간 프로젝트 도시서점이었다. 잡지에서 볼 수 있던 콘텐츠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 도시서점의 첫 번째 콘셉트는 어반라이크 35호를 실체화한 문구점의 형태였다. 혹시 회사를 그만두어도 서점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고, 비록 주입식이었어도 문구에 관심이 생긴 나로서는 꽤 흥미로웠다. 자발적으로 인사 발령을 희망했다. 대표님과 편집장님이 능동적인 내 모습이 새로우셨는지는 몰라도 이름 뒤엔 에디터 대신 매니저로 불리는 것과 업무 환경이 논현동에서 도곡동으로 바뀌는 것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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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물에서 공간으로 콘텐츠가 구현되는 플랫폼만 바뀌었지 준비하는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점이자 문구점을 표방하면서 다른 범주의 콘텐츠도 다양하게 소개하고자 했다. 다양한 도시를 대표하는 브랜드와 어반라이크를 만들면서 연이 닿은 크리에이터들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책을 만들고 때때로 오프라인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주 업무 범위였던 어반북스가 준비하는 첫 상업 공간이다 보니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아무래도 수익이 직결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걱정에도 놀랐던 건 도시서점에 입점하는 브랜드나 크리에이터가 우리의 콘셉트에 매우 호의적이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적극적인 모습에 고맙기까지 했다. 과거와 현재의 가치를 잇는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가 디자인한 도시서점의 아이덴티티부터 철제 합판으로는 처음 제작되는 문승지 작가의 포 브라더스, 어반라이크의 디자인을 쭉 맡아온 디자인 스튜디오 마이케이씨의 우표 컬렉션, 오프라인 매장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카탈로그4182의 숍인숍, 도쿄와 베를린, 워싱턴 D.C.를 대표하는 문구 브랜드 셀렉션, 마지막으로 어반북스가 제작한 단행본 및 잡지 컬렉션까지. 많은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도시서점에서만 볼 수 있는 콘텐츠들이 하나씩 갖추어져 어반북스가 제안하는 진화된 형태의 서점이 그대로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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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들 또한 허투루 놓지 않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남지 않았으면 하는 점에서 개성 있는 오브제들이 하나둘 놓이기 시작했는데, 루이스 폴센, 브라운, 비초에, 아르텍 등의 오브제는 공간의 기품을 한껏 묻어나게 하고 동시에 내 눈높이까지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 집이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로 그 근거다. 이제 도시서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일의 강도만 따지면 잡지를 만드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익힐 것이 너무나도 많다. 일단 공간의 의의로 시작해 판매하는 상품의 특징, 가격, 브랜드들의 정보, 오브제로 놓인 물건들에 관한 이해까지. 줄줄이 암기한다기보다 누가 불시에 물어도 즉각 설명할 줄 알아야 하니 그것들을 내 언어로 익히는 게 참으로 고단했다. 말을 잘 못 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말을 잘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내가 웃기면서도 흐뭇하다. 고되지만,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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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픈 기간 동안 호기심에 들어온 손님들이 공간을 둘러보고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두 가지 양상을 띠는데 “이렇게 해도 장사가 될까요?” (시비조는 아니다) 따위의 현실적인 걱정과 “이런 재미있는 곳이 생겨서 좋네요.” 같은 흥미 섞인 응원이다. 뭐가 됐든 관심 있게 여기는 것이 감사했다. 앞으로 더 다양한 사람이 이곳을 찾을 거고 소위 말하는 진상 손님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오픈하고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걱정이지만, 처음으로 일 속에서 ‘취향’을 찾은 듯한 내 선택을 믿어보려 한다. 어느 쪽이든 다 걱정하는 거라면 조금 더 두근거리는 쪽에 서서 걱정하는 것이 더 좋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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