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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l Mar 30. 2020

부엌을 추억하며

200330

대학 입학 전까지 살았던 부산의 고향 집의 화장실은 독특했다. 세수를 하거나 몸을 씻는 것은 부엌 싱크대 옆에서 해야 했으며, 분리된 화장실은 나름 현대적인 형태의 ‘수거식’이었다(자세히 설명하고 싶진 않다). 20년간 쪼그려 앉아 세수하고 용변을 보니까 벌써부터 무릎이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온수가 나오지 않았단 거다.


게다가 부엌(욕실?), 화장실은 마당과 바로 연결되는 구조여서 겨울에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겨울철에 씻으려고 하면 최소 10분 전에는 냄비에 물을 받아 끓여놔야 했다. 세숫대야 바로 옆 싱크대에 가스레인지가 놓여 있던 건 동선을 생각한 엄마의 판단이었으리라. 씻기 전 물을 끓이러 부엌에 가야 하는 일은 참 귀찮았으며, 물이 끓는다고 엄마가 부엌에서 소리치는 말도 최대한 늦게 들렸으면 했다.


샤워라도 하려면 혼자 있어야 했다. 그래야 했기에 당연히 밥 먹기 전이나 후에는 잘 씻을 수 없었고, 가족 중 누가 샤워하는 중이면 냉장고에 접근할 수 없었다. 나의 경우 씻는 동안에 문을 벌컥벌컥 열고 불을 끄고 도망가는 아빠와 형의 장난이 달갑지 않았다. 추워서! 추워서!


물론 좋은 기억도 있다. 학원이 늦게 끝나 밤늦은 시간에 씻어야 할 때 내게 인사하러 오던 마당에서 살던 강아지들이라든가, 등굣길에 매일 마주치는 여학생에게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고 싶어 물 끓은 냄비에 넣고 뜨끈해질 때까지 기다리던 아침 날도 좋았다.


이사한 지금의 고향 집에는 온수도 잘 나오고 수세식 변기가 있는 화장실도 두 개나 있다. 부모님이 더는 춥게 씻을 일도 없고 쪼그려 앉을 일도 없다. 이제는 우리 가족만의 남다른 추억이 되었다. 그래도 부지런히 잘 씻었던 게 신기하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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