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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l Jun 22. 2020

포천 2

200606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목소리가 들리는 상황이 싫다. 이를테면 대중교통에서 전화가 왔거나, 조용한 공간에서 대화해야 하는 상황 같은. 정말 낯 뜨겁다. 그렇지만 포천에서 내가 겪은 사람들은 달랐다. 자신들의 대화를 내가 다 들을 수 있다는 걸 상관치 않았다.

호수 샛길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먹해 보이는 남녀가 옆에 앉았다. 연인 사이는 아닌 듯한 그들은 서로를 알아가려는 대화를 해나갔다. 그들의 대화를 정말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들릴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짧게 짧게 오가는 말에 어떻게든 존재했던 작은 웃음들은 나까지 어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은 각자의 넷플릭스 취향이나 자기 몸에 털이 얼마나 나는지, 언제 자고 일어나는지 등, 앞으로의 그들에겐 중요할 수도 있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윽한 장소에서 혼자 고고한 척 다 하고 앉아있는 내가 고까워서 이러나 싶었다. 둘만 있고 싶어 자리를 피해 달라는 눈치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왠지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나는 꿋꿋이 소설을 읽었다. 둘 사이에는 정적이 잠깐 생겼다가도 위태한 대화가 계속되었다. 남자는 이어지는 화두로 ‘책’을 꺼냈다. 책을 좋아하냐는 그의 말은 다급하게도 느껴졌는데, 옆에 앉아 책을 깨작대고 있는 나를 보고 그 말을 꺼낸 것이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는데 다행인지 그들은 듣지 못했다.


- 책 좀 읽어?

- 아뇨 책 거의 안 읽죠. 읽어야 하는데 아~

- 나는 얼마 전에 진짜 오랜만에 자기 계발서 하나 읽었어.

- 책 펴는 것부터 너무 어려워요.

- 그치? 힘든 일이야…


대충 이런 대화였다. 내게 무안을 주려는 행동은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그들은 이내 흐지부지한 대화를 계속하다가 바닥에 나타난 벌레를 보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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