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마(軍馬)를 키우던 강화 진강목장
모내기를 앞둔 5월 초순의 강화도는 또 다른 바다입니다. 봄물을 실은 들판은 바다인 양 늠실거립니다. 왜가리 몇 마리가 고개를 쳐 박고 논바닥을 훑어댑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백 년 전의 강화도는 어땠을까요. 강화 두두미 마을의 한 선비는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노래 했습니다.
鎭江山色碧如屛 진강산 산색은 푸른 병풍을 친 듯 하고
片片歸雲錦繡形 흐르는 조각구름 비단에 수놓은 듯하다
首智遺墟可處是 수지현 옛 터는 어디쯤에 있을까
造翁筆下影丹靑 조물주의 붓끝 아래 단청이 그려졌네
- 고재형(1846~1916) <심도기행>
진강산은 강화도 양도면과 불은면을 아우르고 있는 산으로 강화에서는 마니산 다음으로 높습니다. 이 산의 남쪽에는 조선시대 군마(軍馬)들을 키우는 '진강목장'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산 아래 마을에는 목장과 연관된 지명들이 더러 남아 그때를 상기시켜 줍니다.
조선시대에 말은 가장 빠른 이동수단이었습니다. 말은 역참에서도 쓰였지만 그보다는 군마로 활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말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 나라에서는 마장(馬場)을 특별 관리했습니다. 말하자면 말 목장은 나라의 기간산업이자 군수산업이었던 것입니다.
말 목장은 대부분 섬이나 바닷가의 툭 튀어나온 곶(串)에 위치했습니다. 섬은 사방이 바다여서 말이 도망치기 힘들고, 외부에서 맹수나 도적의 침입이 어렵습니다. 또 섬은 육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어 목장에서 키우는 말이 농경지를 침범해 농사를 망치는 피해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군마(軍馬)를 키우던 강화 진강목장
강화도는 도성인 한양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목장에서 키운 말은 육지로 옮겨져 왕실이나 관청에 공급되었습니다. 또 중국에 조공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목장이 육지에서 많이 떨어진 섬에 있으면 말을 이동 시키는데 어려운 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화의 경우 물길과 육로를 이용해 하루 해 안에 도성에 당도할 수 있었으니 목장지로는 최적지였던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강화도에 9군데의 목장을 두고 군마를 키웠습니다. 1820년 무렵에 제작된 '강화부 목장지도'를 보면 당시 강화부 관내에는 진강, 북일, 매음도, 주문도, 장봉도, 신도, 거을도, 볼음도, 미법도 등지에 목장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강목장은 강화군 양도면 일대이고 북일목장은 화도면 내리, 매음도는 지금의 석모도를 말합니다. 장봉도, 신도, 거음도는 지금은 옹진군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강화부 소속이었습니다.
진강목장은 규모면에 있어서는 제주도 다음 가는 목장이었습니다. 약 1500여 필의 말을 방목해서 키웠는데 우수한 군마(軍馬)가 많이 나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진강목장은 준마가 많다고 일컬으니, 효묘(孝墓)께서 설립하신 뜻이 진실로 우연하지 아니하다"(숙종실록 15권)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진강목장에는 이름난 명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효종은 이 말을 특별히 사랑해서 '벌대총(伐大驄)'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엄명했습니다. '벌대총'은 '청나라를 칠 말'이란 뜻의 이름으로 효종의 북벌 의지를 담은 명마입니다.
북벌을 꿈 꿨던 효종 임금
조선의 17대 왕인 효종은 인조 임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왕자 시절 '봉림대군'이라 불린 효종은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적실 왕자였지만 위로 형님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님인 '소현세자'가 병사한 후에 둘째 왕자였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 왕이 됐습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략한 청군은 봉림대군을 비롯해서 많은 수의 양민들을 볼모로 잡아갔습니다. 왕자 시절에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서 8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었던 효종은 그 치욕을 잊지 않았습니다. 왕이 된 그는 조심스레 북벌의 꿈을 키웠습니다. 진강목장에서 군마들을 키웠던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던 것입니다.
병자년의 호란으로 국토는 초토화 되었습니다. 죽고 다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으며 인질로 잡혀간 백성들의 수는 얼마나 될 지 감을 잡기도 어렵습니다. 남한산성으로 피난갔다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한 왕의 치욕은 또 어떠했던가요. 그러니 청에 대한 원한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진강산을 오르노라면 꼭대기 근처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가운데에 어른 주먹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 크기의 홈이 파여 있는데 옛 사람들은 이 홈을 효종 임금이 아꼈던 벌대총의 말발굽 흔적이라고 봤습니다. 벌대총을 하늘이 내린 말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북벌을 꿈꾼 효종의 비원(悲願)은 조선 백성들의 염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강산의 너럭바위에도 서려 있는 것입니다.
벌대총의 전설
왕의 행차가 있을 때는 벌대총을 한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강화에서 한양까지 가자면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하루 해가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도중에 있는 고을의 수령들은 벌대총을 임금의 행렬인 양 대해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벌대총이 다치거나 병에 걸릴까 봐 노심초사 했습니다. 효종이 총애하는 벌대총인지라 잘못 되면 문책을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강화로 돌아오던 벌대총이 병에 걸렸습니다. 시름시름 앓던 벌대총은 양천(현 서울시 양천구) 범머리마을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양천 원님의 처지가 난감해졌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아뢰어야 할 지 고심하느라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대궐로 들어가 임금을 알현했습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벌대총이 누운 지 사흘이요, 먹지 않은지도 역시 사흘입니다." 이 말을 들은 효종이 물었습니다. "벌대총이 죽었다는 말이냐?"
임금은 그 누구든 벌대총이 죽었다는 말을 하면 엄벌을 내리겠다고 한 터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선뜻 벌대총이 죽었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양천 현감의 '누운 지 사흘이요, 여물을 먹지 않은 지도 사흘 째'란 말은 곧 벌대총의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입니다.
효종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을 했습니다. '벌대총을 타고 청나라를 치려는 뜻을 하늘이 버리시는구나'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후로 '양천 원님 죽은 말 지키듯 한다'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일 때 이 말을 썼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말 목장들은 차차 줄어들고 폐지됐습니다. 농지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더 우세해졌기 때문입니다. 강화도의 목장들도 축소하고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어졌습니다. 숙종 34년(1708) 강화유수 박권은 왕에게 진강목장의 폐지를 요청하며 다음과 같이 이유를 설명합니다.
호국(護國)의 뜻은 여전하다
'진강의 목장이 섬사람들의 해가 되고 있습니다. 곡식이 여물 때는 마을 사람들이 말을 몰아내기 위해 밤마다 떠들고... (중략) 수확 후 저장하지 못한 곡식은 말 떼가 지나면 죄다 없어지고 남은 것이 없어 백성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숙종실록 34년 12월 3일)
진강목장은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부국강병의 기상은 지금도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군마들을 조련하고 키웠던 진강목장은 지금 또 다른 호국의 간성(干城)들을 키우고 조련하는 터가 되었습니다.
진강산의 남쪽 골짜기에 포병부대가 있습니다. 과거의 군마가 현재의 포병으로 치환돼 양성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벌대총이 흰 갈기를 휘날리며 달렸던 진강목장에서 지금 푸른 옷의 군인들이 강병으로 훈련받고 있습니다. 북벌의 꿈을 담은 진강목장은 평화와 통일을 꿈꾸며 그 기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