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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숙 Oct 27. 2022

내 어찌 강화를 잊겠는가 - 철종의 강화도 사랑

작년(2021)에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드라마가 있었다. 코믹 사극 '철인왕후'가 그것이다.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의 허세 많은 청년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조선시대의 철인왕후에게로 영혼이 이동을 하여 벌이는 좌충우돌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드라마 ‘철인왕후’는 조선의 25대 임금인 철종과 그의 정비인 철인왕후가 주인공이다. 철종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철인왕후란 이름은 생소할 것 같다. 철인왕후는 당시 세도정치를 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안동 김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위세가 대단했을까.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철인왕후는 평소 친정을 두둔하지 않았고, 조정 대사에 관여해서 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드라마를 통해 볼 수 있는 당찬 모습과 달리 말이 적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용흥궁 전경



철종과 철인왕후


철인왕후와 철종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조혼의 풍습이 있을 때였다. 양가의 자제와 규수들은 10대 중반 무렵이면 혼인을 했다. 그러나 철종은 왕이 되었을 그 때까지 총각 신세였다. 철종은 19살에 왕으로 옹립되었고 이듬해인 20살에 철인왕후와 혼인을 했다. 결혼 당시 철인왕후가 14살이었던 것에 비춰보면 철종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결혼이 늦었던 것은 분명하다. 철종에게 어떤 하자가 있었기에 결혼을 하지 못했을까.


철종은 왕가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철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자 출신이었다. 철종의 증조할아버지는 사도세자다. 사도세자는 정비에게서 정조를 낳았고 후궁의 몸을 빌려 또 여러 자식을 두었다.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그렇게 후궁에게서 태어났다. 은언군은 결혼해서 정실부인 이외에 소실을 두었고, 철종의 아버지는 은언군의 소실에게서 태어났다.


철종의 아버지는 서자여서 왕손으로써의 작호는 받지 못했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서자였지만 왕자(사도세자)의 아들이었기에 ‘은언군’이라는 작호를 받았지만 철종의 아버지는 서자의 서자였기 때문에 작호를 받지 못했다. 그도 또한 소실을 두었는데 그 중 염씨 성을 가진 여인에게서 철종을 얻었다. 나중에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전계부원군'이라는 작호가 철종의 아버지에게 내려졌고 어머니 염씨에게는 '용성대부인'이라는 작호가 내렸다. 왕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니 부원군과 대부인의 작호가 내린 것이다.


철종이 왕으로 옹립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철종은 그 전 임금인 헌종과는 7촌 관계였다. 만약 헌종과 그 윗대인 순조에게 자손이 번성했다면 왕위가 철종에게 올 일은 결단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헌종이 승하했을 때 왕위를 이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헌종과 7촌간인 철종이 왕으로 옹립되었던 것이다.


철종의 할아버지(은언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정조대왕과 이복형제였다. 정조의 아들이 순조이고 그 다음 왕인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니 엄밀히 따지자면 철종은 헌종의 7촌 아저씨인 셈이다. 윗사람인 철종이 조카의 대를 잇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서 철종을 순조의 양자로 들이는 편법을 썼다.




신분세탁을 한 철종


철종의 집안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철종이 왕이 되자 신분세탁을 위해 자료들을 다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에 대한 문적(文蹟)을 모조리 세초(洗草)하라고 시켰다. 세초(洗草)란 조선 시대에,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한 후에 훗날 구설을 막기 위하여 그 초고를 없애던 일을 말하는데, 순원왕후는 은언군에 관한 기록들을 물로 씻어서 글자를 없애 버리라고 한 것이다. 은언군과 철종의 큰아버지인 상계군 등이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된 점을 들어 혹여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정치적인 위험 요소들을 미리 제거한 셈이다.


철종의 어릴 때 이름은 '원범'이다.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왕실의 큰 어른인 순원왕후(순조의 비)는 다음 왕 위를 이을 사람으로 원범을 낙점한다. 그래서 졸지에 원범은 왕이 되었다. 원범은 자신을 모시러 온 봉영(奉迎) 대열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산으로 도망을 갔다. 역모로 몰려 형이 잡혀 죽은 것을 본 뒤라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의 둘째 형은 급하게 도망을 가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 원범과 그의 형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을지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철종을 모시러 온 봉영 행렬 (강화도령,1963 영화. 신상옥 감독)



왕으로 등극을 하지 않았더라면 철종은 보통 평민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농사는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워야 일머리도 알고 몸에도 익는 법인데 철종은 14살이 되도록 한양에서 살았으니 언제 농사를 배웠겠는가. 땔나무 역시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무 한 짐인들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원범이었으니 강화에서의 삶의 무척 힘겨웠을 것 같다.


실제로 '철종실록'에는 동네의 무뢰배가 술에 취해 원범에게 말을 함부로 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원범에게 뒤를 봐줄 사람이 있었다면 어찌 그들이 함부로 할 수 있었겠는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왕손에게 동네 사람이 그렇게 불손한 언행을 했다는 것은 당시 원범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하고 딱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강화에서 존재감도 없이 살던 원범이 하루아침에 만인이 우러러 보는 왕이 되었다. 그러니 이 어찌 드라마틱하지 않을쏜가. 그래서 철종에 대한 온갖 억측과 상상들이 보태지고 부풀려져서 저자거리를 떠돌았다.


철종에 대한 오해


철종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많다. 철종에 대한 오해 중에는 그가 일자무식이란 것도 있다. 철종이 비록 서자에다 강화도에서 지냈다 하더라도 그는 엄연히 종친이었다. 왕손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으니 어린 시절의 철종은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 소양을 갖추는 교육은 받았다. 왕이 된 후에 사가(私家)에 있을 때의 교육 정도를 묻는 질문에 '소학'까지 배웠다고 철종은 말한다. 그럼에도 마치 일자무식인 것처럼 시중에는 알려져 있다.


또 강화도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오해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철종이 강화에서 산 기간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한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14세에 아버지의 유배지였던 강화에 와서 이후 왕이 되어 떠나던 19세까지 강화도에서 살았을 뿐이다.


강화도행렬도 부분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강화역사연구소 자료)



철종을 안동 김씨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나라를 운영하지 못한 무력한 임금으로 알고 있는 부분도 있다. 백성을 위한 치세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편하게 살려고 한 임금으로 사람들은 철종을 기억한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 철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용렬한 임금만은 아니었다. 왕위에 있는 동안 그는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당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강고한 벽을 깨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 속에 어리석은 임금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철종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조선시대는 혼인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결속하던 시대였는데 원범의 집안은 그런 것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자 출신인데다 외가 쪽 역시 변변찮은 집안이라 철종의 뒤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철종은 단단하게 구축이 되어 있는 기성 정치권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맨 몸으로 부딪히며 견디어 나간 사람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내 어찌 강화를 잊겠는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제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철종이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노력을 한 부분이 철종실록에 담겨 있다. 또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살았던 강화도에 대한 특별한 마음 역시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부모님을 다 잃고 사고무친한 자신을 거두어준 강화였기 때문이었을까. 철종은 강화도 주민들만을 위한 특혜를 베푼다.


"내가 강화부에 어찌 특혜를 입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과 곡식과 묵은 세금 빚 가운데 징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없애 주고,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강화유수로 하여금 조정과 상의하여 그 장점을 따라 조치하도록 하라." <철종실록>


또 철종 4년에는 강화도의 유생들만이 응시할 수 있는 특별과거를 시행하도록 하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조선은 이미 속으로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더구나 철종은 힘이 없는 왕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철종 어진



지난해 봄에 강화읍에 있는 용흥궁에 갔던 적이 있다. 용흥궁은 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왕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정상적인 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인해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라고 하였다. 용흥궁 역시 잠저로 강화도령으로 불리었던 철종이 살았던 집이다. 원래는 보잘것없는 초가였으나,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른지 4년 만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용흥궁의 봄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였는데 현재 내전과 외전 그리고 별전 등이 남아 있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사람이 살지 않지만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용흥궁은 살림집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안채며 바깥채 그리고 행랑채 등 각 건물마다 따로 살림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마당 한 쪽에 있는 우물도 당시에는 물이 풍부해서 대여섯 가구의 사람들이 다 그 물을 먹었다고 한다.


생전에 강화를 위해 특별한 마음을 낸 것처럼 사후에도 이렇게 강화 사람들에게 곁을 주었던 철종이었다. 그는 비록 초가에서 옹색하게 살았지만 왕이 된 덕분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강화에 남겼다. 초가삼간 집이었다면 어찌 대여섯 가구씩이나 그 집에 깃들어 살 수 있었겠는가. 비록 역사책에는 무능한 왕으로 그려져 있지만 강화도 사람들에게 그는 특별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용흥궁의 안마당에는 햇살이 고요히 머무르고 있었다. 담장 아래에는 복수초가 노란 꽃잎을 막 내밀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복수초의 노란 꽃잎이 대견하게 보였다. 봄기운이 용흥궁에 감돌고 있었다. 마치 용이 되어 떠난 원범(철종)이 잠시 놀러오기라도 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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