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랑에 목말랐던 그녀들, 영화 <안개 낀 밤의 데이트>
그곳은 오후나 되어야 부스스 깨어난다. 밤이 되면 활짝 피었다가 새벽이면 지는 그곳을 사람들은 '사창가'라 했다.
평택역 앞 사창가에 내 일터가 있었다. 아가씨를 여럿 두고 돈을 끌어담던 포주가 내 고객이었다. 포주에게는 4명의 아이가 있었고 나는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 선생이었다.
돈도 잘 버는데 왜 살림집을 따로 마련하지 않는지, 포주는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그 속에서 키웠다. 현금 장사라 돈은 많았지만 애들을 돌볼 짬이 없었던 부모는 내게 아이들의 공부를 맡겼다. 맨 위 큰 애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고 막내는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였다. 큰 애는 벌써 알 것 다 아는 눈치였다.
사창가의 그녀들
그 골목에 들어서는 게 늘 어색했다. 유리문을 반쯤 열고 밖을 내다보던 아가씨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아가씨들은 내가 지나가면 외눈으로 쳐다봤다. 그들과 나의 처지는 아마도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지 않았을까. 나는 대학을 나왔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남편도 있었다. 더구나 포주인 아이들의 엄마는 나와 먼 인척간이어서 내가 눈꼴시러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동안 나와 말을 섞지 않던 아가씨들이 언젠가 부터 내게 말을 걸었다. 짙은 화장 속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이들은 생각보다 어렸고, 그래서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방도 구경시켜 주었다. 커다란 침대가 맨 먼저 눈에 들어오던, 붉고 어둡던 방이었다.
▲ 1963년에 발표된 그리스 영화 <안개 낀 밤의 데이트>는 영화 속에 흐르는 삽입곡 'Ra Playa'로도 유명하다. ⓒ 바실리 조르디아스
영화 <안개 낀 밤의 데이트>(Ta Kokkina Fanaria)는 평택역 앞 사창가를 떠올리게 했다. 몸 파는 여주인공들의 신산한 삶을 따라가는 내내 나는 평택역 앞의 그 골목을 생각했다. 영화 속 그녀들은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실제 생활은 암울하고 어두웠다. 평택역 앞의 그녀들처럼...
1963년에 발표된 그리스 영화 <안개 낀 밤의 데이트>는 영화 속에 흐르는 삽입곡 'Ra Playa'로도 유명하다. 이 곡은 원래 영화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일본에서 영화를 수입해 추가 삽입곡으로 넣어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된다. 쓸쓸하면서도 애잔한 기타 연주곡을 따라가노라면 아련하게 그리운 마음마저 든다.
전주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음악이지만 정작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지 않았다. 항구의 홍등가를 배경으로 4명의 창녀가 보여주는 힘겨운 인생살이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당시 우리나라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검열의 벽을 넘을 수 없어 개봉되지 못했다. 다행히 고전, 예술영화를 찾아 디지털로 복원해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어 볼 수 있었다.
생의 한 때를 그리움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래서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돌아봤을 때 애틋한 마음이 든다면 그 인생행로는 결코 실패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런가. 하지만 영화 속의 그녀들에게 그리움은 사치였다. 먹고 살기 위해 웃음을 팔고 몸을 건네는 그녀들에게는 사랑 역시 사치였다.
사랑에 목말랐던 그녀들
그녀들은 늘 사랑에 목말랐다. 그러나 갈증을 해소해 줄 진정한 사랑의 비는 오지 않았다. <안개 낀 밤의 데이트>는 그래서 갈증에 허덕이는 그녀들의 애소(哀訴)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사랑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믿지만, 사랑의 단비는 내리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수 없는 그녀들의 삶은 불빛을 쫓아 헤매는 하루살이 인생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각을 공부하는 이집트 유학생을 사랑하는 '에리나'는 루마니아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다. 순정을 다 바쳐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녀는 신분을 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만남은 늘 안개가 낀 듯한 밤에 이루어졌고, 헤어질 때면 매번 아쉬움에 몸을 떨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두 연인은 비를 흠뻑 맞으며 거리를 걷는다. 비는 마치 하늘의 선물인 양 흐뭇하게 내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을 고백할 때 손에 물을 담아서 해요."
그녀를 보며 남자가 말한다. 에리나는 두 손으로 비를 받는다. 마치 사랑하는 남자의 고백을 담기라도 하는 양. 그런 그녀의 모습은 천진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비는 대지의 갈증을 해소해 주기도 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내리기도 한다. 비는 흐르는 눈물도 감춰 준다. 한바탕 퍼붓는 비를 흠뻑 맞노라면 아픔까지도 씻겨 내린다. 그러나 내리는 비를 어찌 두 손에 다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설령 담는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버리고 결국에는 흔적만 남을 것이다.
비는 그냥 온몸으로 흠뻑 맞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그녀들에게는 기껏해야 안개만이 허락될 뿐이다. 안개 속에 자신을 숨기고 스며들던 그녀들, 안개가 걷히면 초라하고 누추한 본 모습이 드러났다.
외항선의 선장은 육지에 닿을 때면 찾았던 창녀 '안느'에게 이제 그만 정착하고 싶다고 한다. 아들을 낳고 아내와 함께 안락하고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싶다면서 그녀에게 청혼한다. 오랫동안 함께 한 안느가 가족같이 느껴져서 편하고 좋다면서 함께 아침을 맞이하자고 한다. 안느는 선뜻 그러자고 응하지 못한다. 그녀는 숨겨둔 아들까지 있는 자신이 초라해서 그토록 바라던 결혼과 안정된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선장이 선물로 준 십자가 목걸이를 매만지며 배가 떠난 부두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 고동을 울리며 떠나는 배를 바라보는 '안느'. ⓒ 바실리 조르디아스
아들에게까지 자기 일을 숨겨야만 하는 안느,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이지만 세상의 이목 앞에서는 떳떳하지가 않다. 선장은 그런 그녀를 안다. 비록 몸은 팔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선장은 알고 있었다. 십 년 동안 만났으니 그들은 이미 부부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신은 '안느'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마지막 항해에서 돌아오면 은퇴한 뒤 정착을 할 계획이었던 선장은 안느에게 돌아오지 못한다. 대서양 한가운데서 배가 난파를 했고, 그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기둥서방에게 목메고 사는 여자도 있다. 자신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 같은 남자이건만 사랑에 취한 여자는 그것이 쥐약인 줄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며 버리지만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그녀는 무참하게 버림을 당한다. 그녀의 사랑은 이용 가치가 있을 때까지만이었던 것이다.
포주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발을 들여놓았지만, 그 길은 끈질기게 그녀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일 년이 오 년이 되고, 십 년이 되도록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그녀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늘 사랑에 목말라 하지만 한 번도 시원하게 사랑의 비는 흠뻑 내려주지 않는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운 것
당국의 엄혹한 매춘 금지법이 발령되고 사창가는 철거 위기에 놓인다. 밤마다 환락의 불빛이 명멸하던 그곳은 이제 누추하기만 하다. 그녀들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갈 곳이 없는 그녀들이 의탁을 할 곳은 또 다른 사창가일 뿐, 족쇄는 여전하기만 하다.
사창가에 기대어서 청소와 허드렛일을 해주며 근근이 살아가던 청소부 여자만이 가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오랫동안 남자를 기다렸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자는 늙어서야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늙고 가난하지만 이제 그들은 헤매지 않아도 된다. 판잣집이만 몸을 뉘일 수 있는 집이 있으니.
철거를 앞두고 집기류를 다 꺼낸 텅 빈 홀은 늙은 창녀처럼 헐벗고 초라하다. 모두 떠나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청소부 여자와 늙은 부랑자뿐이다. 가지고 갈 것은 보퉁이 몇 개와 늙고 병든 몸이 전부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겠지요?"
문을 나서며 청소부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인생은 아름다워요."
남자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들 앞에 펼쳐질 인생이 초라할지언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이상 인생은 아름다울 것이다.
<안개 낀 밤의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다. 쓸쓸하고 애잔한 음악과 함께. 영화를 다 보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고 불을 밝혀 총총히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갈 집이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이 밤에 헤매지 않고 쉴 곳이 있으니, 우리는 행복하다. 돌아갈 집이 있는 우리는, 행복하다.
안개 낀 밤의 데이트(Ta Kokkina Fanaria, The Red Lanterns,1963), 그리스 영화
감독 : 바실리스 게오르기아디스(Vasilis Georgiadis)
출연 : Jenny Kalezi, Giorqos Foundas 등
132분, 흑백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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