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종려나무 숲>
“거제도에 온통 수선화 천지인 바닷가가 있대. 노부부가 평생을 들여 황무지를 수선화 꽃밭으로 만들었는데, 봄에 꽃이 필 때면 온 천지가 다 수선화 꽃밭이래.”
봄이 오려면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하는데 친구는 봄이 그리웠는지 문득 수선화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닷가 비탈진 돌밭을 수선화 꽃밭으로 만들었다니, 생각만으로도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도대체 그 분들은 무슨 생각으로 수선화를 심었던 걸까요. 수선화를 심는다고 당장 돈이 될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꽃을 심었다니, 그 사연이 궁금하면서도 신비스럽기조차 했습니다.
하지만 그뿐, 내게 거제도는 머나먼 곳이었습니다. 거제도를 떠올리자면 포로 수용소나 배를 만드는 곳으로나 다가왔지 노란 수선화가 온 천지를 다 덮고 있는 그런 감성적인 곳으로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회색빛으로 삭막한 느낌이었던 거제도였는데 이제는 옥빛 바닷물과 노란 수선화 그리고 종려나무로 기억이 됩니다. 한 편의 영화 덕분에 얻은 기억입니다.
작년 봄이었습니다. <종려나무 숲>이라는 색다른 제목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말을 듣고 동검도에 있는 예술영화관으로 갔습니다. 종려나무라니, 이름만으로도 뭔가 이국적인 느낌이 듭니다. 더운 남국의 하얀 백사장이 떠올랐고 줄지어 서있는 키 큰 야자나무와 비키니 차림의 멋진 사람들도 떠올랐습니다. 낭만과 열정이 이어서 따라왔습니다.
영화 <종려나무 숲>은 2004년, 영화진흥위원회가 실시한 시나리오 공모전의 당선작으로 만든 저예산 영화입니다. 실연의 고통을 잊기 위해 거제도를 찾았던 작가는 공곶이 해변의 종려나무 숲을 보고 크게 위안을 얻습니다. 그리고 긴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와 <종려나무 숲>의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띠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화연(김유미 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그녀의 할머니와 엄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거제도를 배경으로 삼대에 걸친 세 여인의 인생유전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들을 옭아맸던 인습의 굴레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 고통을 인생의 승리로 만듭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인습의 굴레 속에 허덕였던 옛 여인들에 대한 헌사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집 딸인 '봉애(조은숙 분)'는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갑니다. 상대는 나이가 많은 홀아비입니다. 그 집에는 다 큰 딸이 있는데 새엄마로 들어온 어린 신부와는 세 살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어린 신부는 나이 많은 남편이 무서웠고, 두고온 고향도 그리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전처 딸인 '정순'이 친구이자 의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둘은 쓸쓸한 바닷가 마을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처의 딸인 '정순'이 시집을 가버립니다. 마치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딸 역시 팔려갔습니다. 정순에게 주려고 예쁜 고무신도 샀는데, 엄마도 모르게 팔려간 것입니다.
봉애는 물어 물어 딸이 사는 집에 찾아갑니다. 딸에게 줄 꽃신을 꼭 품고서 찾아간 그곳에서 봉애는 못 볼 것을 보고 맙니다. 무당인 정순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쥐 잡듯이 대했고 사위는 엄마 말만 듣는 줏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딸인 정순은 그곳에서 사람 대접도 옳게 못 받고, 마치 가뭄에 말라 시들어가는 식물처럼 생기가 하나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새엄마 봉애는 눈이 돌아갔습니다. 내 배 앓아 낳은 딸도 아니건만 딸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태세로 맞섭니다. 결국 정순을 구출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고, 이후 모녀는 서로 의지한 채 한스러운 세월을 살아갑니다.
영화는 거제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감 없이 담고 있습니다. 밀려왔다 쓸려가는 바닷물에 조약돌들은 자그락댔고,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바닷가 외딴 곳의 오막살이집에서 그녀들은 그렇게 전설처럼 살았습니다.
바다 저 멀리에는 큰 배들이 오갑니다. 그 배들을 볼 때마다 정순은 꿈을 꾸었습니다. 언젠가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배가 이 섬에 휩쓸려 올 것이라는 상상을 하였습니다. 정순의 소망은 이루어집니다. 푹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큰 배 한 척이 떠밀려 와서 며칠 머물게 된 것입니다.
배의 선장은 정순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떠납니다. 종려나무 모종입니다. 그리고 정순의 배 속에도 새싹이 하나 자랍니다. 바로 '화연'입니다.
종려나무를 주고 떠난 남자를 정순은 평생 기다립니다. 그 나무가 자라 숲을 이루면 남자가 다시 찾아오기라도 할 양 정순은 주변에 온통 종려나무를 심습니다. 부질없는 약속을 부여잡고 생을 살아갑니다. 가망없는 기다림에 기대어 삶을 이어가는 정순, 그런 엄마를 보며 '화연'은 자신은 결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작심합니다.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 생을 개척해 나갑니다.
그런 화연에게 사랑이 찾아옵니다. 조선소의 법률담당 변호사로 부임해온 '인서(김민종)'를 그녀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화연은 인서에게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납니다. 가망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를 할머니와 엄마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부질없는 기다림에 자신을 가두지 않습니다. 남자의 약속에 평생을 바쳤던 엄마와 달리 화연은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가꾸어 갑니다.
영화를 본 그날 밤 우리는 거제도를 향해 달렸습니다. 영화 속에서 화연의 엄마와 할머니가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밤을 밝혀 달려간 거제도에는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동백나무 터널을 지나니 다른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옥빛 바다를 바라보는 비탈에는 온통 수선화 밭이었습니다. 친구가 말했던 그 수선화 밭입니다. 봄은 거제도의 공곶이 해변부터 먼저 찾아오는 듯했습니다.
수선화 밭이 끝나는 지점에 색다른 나무들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기약없는 약속의 상징처럼 보였던 종려나무가 진짜로 있었습니다.
끝없는 사막에서 종려나무가 있는 곳은 물이 솟는 오아시스입니다. 종려나무는 사막을 여행하는 나그네들에게는 구원의 표상이자 희망을 뜻합니다. 나그네는 그곳에서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합니다. 목마른 생명들이 물을 마시고 기운을 얻어 생생해집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종려나무의 꽃말은 '부활'이며 '승리'입니다. 그것은 또한 번영을 뜻하기도 합니다. 영화 속의 두 주인공인 화연과 인서는 오랜 세월의 강을 건너 마침내 사랑을 확인합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거쳐 화연에게서 이루어진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종려나무의 꽃말처럼 진정한 '승리'입니다.
거제도 공곶이 해변의 종려나무는 사랑의 확신이었고 또한 승리였습니다. 그 사랑은 할머니와 엄마를 거쳐 화연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종려나무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종려나무숲(Windmill Palm Gorve,2005년, 한국 영화)
감독 : 유상욱
출연 : 김유미, 김민종, 조은숙, 이경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