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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하라 Jul 18. 2020

아이를 가르치는 것

 어른은 꼭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나요?

할머니는 4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섰고, 할아버지 손에는 잠자리채와 곤충채집용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성의 모자 밑으로 보이는 젖은 머리카락으로 보건대 이 가족은 인근에서 신나게 곤충채집을 했고(아마도 아이가 요즘 곤충에 꽂혀있겠지?) 해가 지고 날이 저물게 되자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음료를 마시려는 것 같았다. 가족은 고심하며 메뉴판을 보다가 커피 한 잔과 빙수를 시켰다.


어른 세 명과 아이 한 명


세 사람은 쉴 새 없이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애가 이걸 좋아해, 애가 이거를 하고 싶어 하더라고. 애가 이거를 하는 이유가 이렇더라니까. 어젯밤에는 애가 이랬더라니까. 아까 전에는 애가 갑자기 뛰어서 깜짝 놀랐다니까 등등 세 사람이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만을 계속 이어갔다. 그 모습이 참 정답고 다정해 보였다. 그 사이 가족이 주문한 빙수가 나왔다. 시원한 빙수 위에 동그랗게 올라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아이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할머니는 얼른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퍼서 입에 넣어줬고 아빠는 이를 만류했다. 그리고 아이의 앞접시에 과일을 덜어주었다. "이 과일 먼저 다 먹고, 그러면 아이스크림 먹는 거야." 아이는 울상을 지었다. 할머니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와 아빠의 의견 대립은 첨예했다. 할머니는 날도 더운데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아이스크림을 먹게 주자는 의견이었고,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먼저 먹고 나면 다른 것을 먹지 않으니 아이스크림을 지금 줘서는 안 된다는 아빠의 의견이 상충했다. 아이스크림은 점점 녹아가는데, 두 사람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아이는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난처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이가 과일을 먼저 먹어야 하는가,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되는가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장 어리고 작은 한 사람은 아무 대화에도 끼지 못했다. 아이는 어른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두리번두리번 가족들을 번갈아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다정하게만 보였던 네 사람의 관계가, 그 분위기가 나는 어쩐지 묘하고 의아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아는 것은 어른이니까, 어른이 그런 결정을 내려줘야 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가 소외되어도 되는 것일까 하는 단순한 의문이 들었다. 카페는 네 명이 들어왔는데, 대화는 셋이 하고, 심심한 아이는 내내 카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작은 사고를 쳤다. 뭔가를 만지다가 떨어트리고,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고, 근처에 있는 손님 곁으로 가서 테이블을 기웃거렸다. 그때마다 아빠나 할머니가 와서 아이를 데려왔고 '안돼 안돼 안돼'라는 작고 낮은 음성의 멘트가 반복되었다. 나라도 심심해서 괜히 뭘 부실 것 같았다. 같이 얘기는 나누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으라는 요구가 작은 사람에게는 버겁고 힘들 것 같아서 그 어깨가 측은해 보였다.


나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저런 장면을 정말 많이 봤다. 아이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고,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에 관해서 열심히 얘기하며 즐거워하는 동안 놀아달라고 보채는 아이의 모습을. 나 역시도 그랬던 적이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온종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옆에 보이는 장난감을 급히 쥐어주거나, "엇! 저게 뭐지!"라며 관심을 돌리게 하는 짧은 요령을 피웠던 적이 많다. 엄마와 아빠에게 1분 1초도 떨어지지 않고 아이를 케어하는 것이나 온통 그 아이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자신의 시간이 분명 필요하니까.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게 있어야 다시 힘을 얻어서 그 에너지로 아이를 돌보며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절대적인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 나는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하는 행동은, 아이를 소외시킨 결정이어도 되는가?

아이를 사랑하는 어른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심심한 아이는 홀로 있어도 되는가?

아이가 놀고 싶어 할 때 노는 것과 아이와 놀아주고 싶을 때 놀아주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이에게 옳고 그른 것을,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을 꼭 가르쳐주어야 하는 건가?

만약 그 시기에 가르쳐주지 못하면 그 책임은 어른에게 있는 걸까?

아이를 돌보다는 것은 아이를 위한 일이어야 하는가, 아이가 원하는 일이어야 하는가.





나는 나중에 내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기보다, 그냥 아이와 함께 하는 어른이고 싶다.

네가 먹어야 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어른이 아니라

네가 먹고 싶은 것을 함께 먹는 어른.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같이 해주는 어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아이와 이야기하는 어른.



아직은, 아이가 없어서 할 수 있는 실없는 소리일 수 있다.

모르니까 아무 말이나 해볼 수 있는 것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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