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나

뽀얀 육수 위 미역이 뿜어낸 초록 잉크 한 방울

by 아는이모


문득 눈물이 핑 도는 장면이 내게도 있다. 다 큰 처녀가 해주는 밥만 먹는 게 눈치가 보여 주방에 어슬렁거리기라도 하면 엄마는 몸을 아껴두라고 했다.

“결혼하면 지겹도록 해야 할 건데, 아까워서 못 시켜 먹겠어. 그냥 들어가.”


그렇게 아껴주던 딸은 엄마의 말처럼 지겹도록 밥과 빨래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로 내게도 보살핌을 받던 시절이 있었단 걸 자꾸만 잊었다.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태어난 건지 헷갈릴 정도로.


‘결혼 후 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인생의 버팀목은 가족이다.’라는 말은 왜 주로 남자들 입에서만 나오는 걸까. 그들은 구석구석 금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안간힘을 다해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여성들의 기여를 아는 것일까. 기여에 대한 보상인지, 새로운 과업에 대한 의무인지 몰라도, 여성이란 이유로 집중적으로 섭취한 음식이 있다.


‘미역국’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날. 땡땡이 어머니, 보호자가 된 나는 끼니때마다 미역국을 먹었다. 촉촉한 미역을 씹을 때마다 철썩이는 기장 앞바다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자란 미역이 산모의 입을 통해 젖을 거쳐 아기의 입으로 전해진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하면서. 어쩌면 피만큼 진한 미역국이 엄마와 자식의 인연을 묶어주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불안한 시기에 같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견뎌냈으니 말이다. 탄생일마다 미역국을 먹는 것도 그 시작을 잊지 말라는 의미겠지.

첫 아이를 낳고 시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을 오랫동안 먹었다. 어머님의 미역국은 특별했다. 마치 멸치와 소고기가 육수의 주인공 자리를 놓고 싸우는 동안, 뒷짐을 지고 기다리던 푹 퍼진 미역이 진액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낸다고나 할까. 정체 모를 묵직한 육수와 함께 밀려 들어오는 흐물흐물한 미역을 삼키다 보면 속옷이 흥건하게 젖었다. 하루에 다섯 그릇, 뻘뻘 땀을 흘리며 시어머님의 미역국을 해치웠다. ‘아니요, 못 먹겠어요’란 말을 할 줄 몰라 꾸역꾸역 미역국을 삼키며 어머니가 되는 법을 배웠다.


물론 맑고 고소한 미역국을 먹어본 적도 있다. 결혼 후 첫 생일날, 남편은 아침 일찍 자른 미역 한 봉지와 소고기 한 팩을 사 왔다. 곧 집 안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고기를 볶을 때 참기름을 얼마나 넣었는지,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은 고기 맛도, 미역 맛도, 간장 맛도 나지 않았다. 그냥 참기름 맛이었다. 얼마 전 생일날, 그때의 미역국 이야기를 꺼냈더니, 냉동실 속 돼지고기를 꺼내며 미역국을 끓여 보겠다고 했다. 아마 내가 말릴 걸 알고 일부러 그런 것 같다.


사실 난, 진하고 묵직한 미역국도 기름이 동동 뜬 묽은 미역국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이 제일 입맛에 맞다. 친정에 갈 때마다 추어탕과 된장찌개 (남편은 엄마가 끓인 된장찌개를 극도로 좋아한다)를 먹느라, 미역국을 먹을 일이 별로 없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내가 끓인 미역국에서도 제법 엄마 맛이 났다. 몇십 번의 시도 후 터득한 비법을 이참에 공개해 본다.


황태 한 마리를 곰국을 고 듯 푹 끓인다. 육수가 뽀얗게 우러나면 다시마를 넣고 10분 정도 더 끓인다. 그동안 불린 미역에 조선간장을 넣어 조물조물 치댄다. 미역이 간장에 질퍽해지면 들깨가루를 넣고 또 버무린다. 완성된 육수에 미역을 넣고 약한 불로 은근히 끓인다. 싱거우면 소금이나 액젓으로 간을 맞춘다. 그럼 완성.



난 밥을 말았을 때도 부담 없는, 미역과 국물이 1:3 정도 되는 비율을 선호한다. 뽀얀 육수 위 미역이 뿜어낸 초록 잉크 한 방울로 완성된 연두색 국물에 미역의 질감이 보존돼 씹히는 맛이 살아있는 미역국을. 걸쭉하진 않아도 은은하게 깊은 맛이 나는 미역국을 사랑한다.


덜컥 부모가 되어 어쩔 줄 몰랐을 때도. 아파도 마냥 누워있을 수만은 없을 때도.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갈 뜨고 나면 벌떡 일어났다. 인생의 버팀목이 가족이 아닌 미역국, 또는 추어탕 국물이라고 하면 조금 우스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따뜻한 국처럼,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 용기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마음처럼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난 나를 위한 미역국을 끓일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글 쓰는 나를 돌보기 위해.


언젠가는 내 마음을 채우는 국물처럼 깊고 담백한데 개운하기까지 한 글을 쓸 수 있겠지. 내가 갓 지은 글이 이따금씩 생각나는 따뜻한 국물이 되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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