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 앞으로 간다. 수북이 쌓인 그릇과 냄비를 보며 고무장갑을 낀다. 아끼면 똥이 되고 미루면 짐이 된다는 말을 그렇게나 해놓고선 제때 하면 일도 아닌 것에 또 이렇게 매달린다. 수세미에 하얀 거품을 내고 손끝에 힘을 실어 모서리에 붙은 빨간 양념을 닦는다. 잠수 중인 그릇과 접시를 구조하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방향에 맞춰 꽂는다. 온수와 거품이 만나면 웬만한 것들은 심폐소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다르다. 뚜껑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민트색 고무 패킹. 녀석 사이에 끼인 정체 모를 까만 때는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는다. 녀석을 빼내려 이쑤시개로 후비다 구멍 내기만 몇 번. 어설픈 이쑤시개 공격으로 뚜껑은 쓸모를 상실해 버렸다. 찬장에 잠든 짝 잃은 용기를 볼 때마다 괜한 용을 쓴 게 후회된다. 자세를 바꿔본다. 녀석을 어떻게 하면 고이 빼낼 수 있을까. 식탁 주변을 살피다 연필꽂이 위로 삐죽 나온 게 보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눈금이 벗겨진 ‘자’. 그 ‘자’로 말할 것 같으면 선을 그을 때보다 ‘앉아서 숙제 다 하고 놀라고 쫌!’을 외칠 때 위협(?)을 가하는 용도로, 탁- 치면 쨍하게 울리는 금속 소재로 만든 자다. 호흡을 가다듬고 고무 패킹 틈 사이로 자를 살살 밀어 넣었다. 그러자 스르륵 뚜껑 위로 녀석이 빠져나왔다. 녀석을 거품 물에 담그고, 탈출한 자리를 수세미로 문질렀다. 목욕을 끝낸 고무 패킹을 마른행주로 톡톡 눌러 닦았다. 여기서도 괜한 용쓰기 없기를 실천한다. 늘어나기라도 하면 억지로 끼워 넣어야 하니까.
설거지를 끝내고 내 눈은 베란다 창틀로 향했다. 홈에 끼인 까만 것들이 눈에 밟히는 날. 오늘 어디 한번 걸려보라는 몹쓸 심보가 발동했다. 베란다에서 방치 중인 파란 걸레에 물을 적셨다 헹궜다 비틀기를 열두 번. 회색 창틀은 서서히 본연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반들반들 하얀 창틀을 보니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홈이 문제다. 어둡고 깊숙한 곳에서 달콤한 잠을 자는 먼지들. 창문 교차지점에 낀 먼지는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손가락도 칫솔도 들어가지 않는 좁고 얕은 곳을 쳐다보는데 머릿속이 번뜩였다. 화장실로 달려가 수납장 문을 열고 염색솔을 꺼냈다. 그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먼지를 긁어냈다. 파면 팔수록 줄줄이 비엔나처럼 먼지가 끌려 나왔다. (고백합니다. 몇 년 만에 하는 창틀 청소였습니다.) 10년 묵은 귀지가 탈출하는 짜릿함이랄까.
먼지와 곰팡이의 확장을 ‘안 본 눈 삽니다.’하고 모른척해도 별수 없다. 찝찝함을 누르다 안 되면 언젠가는 뒤집어야 하니까. 이를테면 모처럼 반찬을 만든 날 손에 잡히는 밀폐 용기가 없을 때, 해가 쨍한 날 마음 놓고 바람을 집안으로 초대하고 싶을 때다. 마음이 툭툭 걸리면 움직이란 신호니 어쩌겠는가.
툭하면 울고, 따라 울고, 숨어서 울고, 우는 게 특기인 난 마음 곳곳에 때가 묵혀있다. 틈과 모서리마다 툭하면 밀려오는 설움과 청승이 바글바글 모여 산다. 이 모든 게 호르몬 탓이라 우기는 미성숙한 난, 때를 벗기지 않고도 개운하게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먼지나 찌꺼기가 쌓을 틈 없이 무던하게 툴툴 털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벗겨내고 닦으며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일에도 그럴듯한 의미를 붙여보는 건 어떨까’라고. 별거 아닌 게 특별해지는 놀라움을 느껴보자고. 별거 아닌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되는 거니까.
책은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줄이 평생의 보물이 되기도 한다. 인생에 남을 한 줄의 문장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 것도 요령이다. (독서력, 사이토 다카시)
어쩌다 펼친 페이지에서 보물과도 같은 한 구절을 발견하듯, 사소한 순간이 보물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이게 뭐라 투덜대면서도 속으론 말갛게 웃는 날. 그런 날이 차곡차곡 모이면 볼품없는 내 삶도 윤이 나지 않을까. 잃어버린 연애편지를 발견한 것처럼 인생의 모서리마다 설렘이 남아있기를 속삭여 본다. 마지못해 하는 일만 하고 살아도 괜찮다고. 별 볼일 없는 하루라 도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건 아니라고. 무심코 지나치는 소소한 장면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