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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이모 Apr 30. 2024

돌고 도는 마음이 꽃 같던 봄밤

떨어지는 벚꽃이 아쉽지 않던 날

 

야속한 비바람이 벚꽃을 떨어뜨렸다. 며칠 내 내리던 봄비가 멎더니 한낮 기온이 28도까지 올랐다. 봄이라 하기엔 여름 같던 날 인천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인천에 꼭 한번 놀러 오세요. 빈말 아니에요. 정말 한 번 오세요.”


인천을 가겠다고 S에게 약속한 지 1년. 지루할 것만 같던 4시간 20분은 봄처럼 짧고 달콤했다. 도착시간이 40분이나 지연됐음에도 S는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터미널 옆 백화점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어긴 듯했다. S는 버스가 멈추기도 전에 손을 흔들더니 급기야 내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먼 길 오신다고 고생 많았어요. 작가님.”


자그만 체구에 짙은 눈썹, 시원한 입술 안으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가 매력적인 그녀. 첫 책을 출간하고 더는 글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S는 푹 꺼진 내 마음을 일으켜 세웠다. 다섯 살 아래인 S를 어린 스승이라 부르며 우린 연을 맺었다.


“같은 지하철 탔었나 봐요. 훈이도 내렸데요.”

“정말요? 어디 계시지? 왠지 눈에 딱 띌 거 같은데.”


S의 남편 훈이는 튀르키예 사람이다. 지하철역에서 합류한 그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을 거닐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때때로 두 볼을 간지럽혔다. 떨어지는 벚꽃이 아쉽지 않을 만큼, 초록잎과 바람이 어우러졌다. 식당마다 빨간 간판 위 금색 한자가 번쩍였다.  우린 간판이 가장 큰 이름 모를 중식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빨간 등이 대롱대롱 달린 3층 테라스에 자리 잡았다.


“아내, 춥지 않아요. 옷 더 있어요?”

훈이는 S를 아내라고 불렀다. 와이프가 아닌 아내, 두 글자가 이상하게 듣기 좋았다. S에게 실내로 자리를 옮기자 했지만, 멀리서 온 나를 배려해 분위기 있는 야외 자리를 고집했다. 두 손을 비비는 S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훈이가 신경 쓰였다. 난 가방에서 후드티를 꺼내 S의 어깨에 둘렀다.


“이거라도 하고 있어요. 작가님 추우니 따뜻한 국물 요리도 하나 시켜야겠다.”


티셔츠를 목도리처럼 두른 S를 본 훈이는 이제야 평온을 찾은 보였다. 오랜만에 목격한 애틋함. 덩달아 내 마음도 순두부 마냥 몽글몽글 해졌다. 우육면 국물만큼이나 따뜻한 배려가 테이블 위로 돌고 돌았다. 식사를 마친 후 S의 집으로 향했다. 입구부터 풍기는 인센스 향, 커다란 스피커, 곳곳에 쌓아둔 책, 깜찍한 스탠드에서 S과 훈의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튀르키예는 아침에 가족 모두 식사해야 해요. 아내 가면 아침 만들어야 해요.”

“작가님, 시댁 가세요?”

“네. 8월에 훈이 졸업하면 아마 가서 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어쩌면 한국에서 이들을 만나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S와 훈과의 시간을 소중히 담고 싶었다. 오래도록 곱씹으며 찬찬히 꺼내 볼 순간으로. 따뜻한 차가 차갑게 식도록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먹고사는 이야기와 사소한 유머는 국경을 초월했다. 눈이 반쯤 감길 때쯤에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S가 펴둔 이불 위에는 아기자기한 인형이 놓여 있었다. 매트와 전기장판 그리고 차렵이불이 켜켜이 쌓인 잠자리에서 포근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훈이는 손수 튀르키예식 조식을 준비했고 내가 버스에 오를 때까지 S와 함께했다.


“튀르키예 꼭 오세요. 우리 마미 정말 요리 잘해요. 와서 진짜 자고 가요.”


1년 전 S가 했던 말을 훈에게 들었다. 빈말이 뭔지 모른다는 그의 눈빛은 꿈같은 상상을 불러왔다. ‘어쩌면 다음 만남은 튀르키예 일지도 몰라.’ S와 훈과 보낸 하룻밤이 그날 내린 봄비처럼 내 마음을 적셨다.     





어제는 유난히

바람이 거센 하루였습니다.    

 

가지가 많은 나무가 아니더라도

바람 잘 날이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바람을 타고 씨앗들은

얼마나 신나게 날아갔을까요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던 외진 곳

새로 푸르게 돋아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 어제의 바람 덕분일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 계절산문 –박준->      




S와 훈이 보여 준 말랑하고 포근한 환대는 내 맘을 싹 틔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하루를 선물할 수 있을까.’ 어제의 바람 덕분인지 봄의 끝자락이 마냥 아쉽지만 않다. 분홍과 연두가 들썩이는 4월이 돌아오면, S와 훈이 다시 떠오르겠지. 돌고 도는 마음이 아름다웠던 꽃 같던 봄밤도. 바람을 타고 퍼트린 따뜻한 마음도.


                                                                                                           2024. 4월 마지막 마음자국




훈이 준비한 조식                                            포근한 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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