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마주한 아빠의 정수리
사진 속 아빠는 머리숱이 많은 장발이었다. 어깨에 살짝 닿는 기장에 머리끝이 말린 반곱슬머리, 눈썹은 4B 연필로 색칠한 것처럼 짙었다.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아빠는 다부진 어깨에 날렵한 몸매를 소유한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몇 없는 전신샷은 체크셔츠를 바지 안으로 넣고 벨트 위에 양손을 올린 포즈가 한결같았다.
아빠의 장발은 사진으로만 감상 가능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나를 붙들고 찍은 사진에서도 아빠는 장발이었다. 체크셔츠 대신 하얀 메리야스로 바뀌었을 뿐.
내 기억 속 아빠는 선거철 포스터에 등장할 법한 헤어스타일을 고수 했다. 뿌리부터 살린 적당한 볼륨 덕분에 이마를 훤히 드러내도 과하지 않았다. 새까만 머리는 풍성한 눈썹과 세트였다. 칠대삼 가르마는 강풍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했고 한올의 새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늙지 않는 아빠였다. 내가 이십 대가 돼서도 (아빠 나이 오십 무렵) 아빠의 머리는 한결 같이 풍성하고 까맸다. 아빠 키는 165. 나와 2센티 밖에 차이 나지 않았지만 아빠는 내게 큰 사람이었다.
소파에 누워 리모컨만 쥐고 있는 아빠가 미울 때도 많았다. 식탁에선 뭐가 못마땅한지 자주 미간을 찌푸렸고, 전화는 늘 말없이 끊곤 했다. 살갑지 않은 다 큰 딸에게 무뚝뚝한 아빠는 위대하지만 불편한 어른일 뿐이었다.
그런 아빠가 어느 날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날은 내가 결혼한 사람을 데려간 날이었다. 알고 보니 아빠는 질문 폭격기였다. 그러다 여동생 마저 결혼해 두 명의 사위와 세명의 외손자가 생기자 아빠는 더욱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다중인격. 손주들이랑 장난칠 때는 장난꾸러기 형 같다가도, 사위들을 앉혀 놓고 설교할 땐 꼭 교장선생님 같았다. 아빠가 '그건 말이지, 내 생각에는 말이야'로 운을 떼면 두 남자는 다리에 쥐가 나도록 자리를 지켰다.
아빠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웃음이 많아진 순간부터 아쉽게도 아빠의 키는 줄기 시작했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휑한 정수리마저 보였다. 까만 머리색은 그대로였지만 정수리 쪽 두상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앞머리를 끌어모아 넘겨야 겨우 가려질 정도였다.
얼마 전 할머니 제삿날 큰 절을 올리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는데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키도 어깨도 줄어 들어서 풍덩해진 양복 재킷이,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아빠의 텅 빈 정수리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머지않을 미래에 누군가의 딸이었을 '내'가 기다리고 있다.
(상상 과거형 슬프다) 쪼그라드는 아빠를 마주하고서야 아빠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빠를 오래도록 탐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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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빠는 작년에 세로 화면이 두 개인 폰과 손목 시계를 샀다. (갤럭시 Z폴더+갤럭시 워치)EF소타나 구입 후 삼십 년 만의 플렉스였다.
손목에 동그란 시계를 차고 커다란 화면을 터치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리고 여행가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는데 하나같이 사진 구도가...(그 느낌 맞다)
요즘 아빠는 정체 모를 밴드에 가입해서 각종 수산물을 주문한다.(코다리, 갈치, 가오리, 가자미, 전복, 새우, 홍게 등)
덕분에 친정에 가면 새로운 요리를 먹을 수 있다. (맛있진 않다는 말) 아빠는 내가 엄마표 된찌와 추어탕을 제일 좋아하는 걸 모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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