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 느낄 때 불러내는 말

따뜻함도 다정함도 전염될 수 있다면

by 아는이모


‘당신의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오래전부터 수첩에 적어둔 글이다.


따뜻한 눈빛으로 나의 말을 기다려 주는 사람에게 우리는 마음을 꺼내놓으며 위로를 받곤 한다. 포기가 익숙하고 감내하며 사는 삶에 꽤나 큰 힘이 된다. 왜 이제야 말하느냐 캐묻는 대신,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냐며 함께 아파해주는 이들 덕분에 그럭저럭 무탈한 하루가 계속되는지도 모른다.


자주 들리는 집 앞 카페가 있다. 수제 마카롱과 쿠키를 파는 테이크 아웃 전문점이다. 테이블이 2개뿐이지만 라테 향이 좋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내가 쿠키를 굽고 남편이 커피를 내리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꿨던 일상을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좁은 공간에서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을 쌓는 일은 나만의 은밀한 행복이기도 하다.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오기 2시간 전 읽던 책과 다이어리를 챙겨 그날도 카페로 향했다.

"따뜻한 라테 한잔 마시고 갈게요."

"머그에 드리면 되죠?"

"네"


참, 그리고 손님- 하며, 사장님이 건넨 볼펜 하나. 아뿔싸 또 볼펜이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


허겁지겁 나를 따라 달려 나온 사장님께 건네받은 0.3mm 메이드 인 재팬 볼펜 이후 0.5mm 모나미 볼펜이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이름 대신 00 도서관이 적힌 볼펜. 쉽게 쓰고 버려도 될 것을 후하게 나눠주는 자리에서 받은 볼펜이다. 그립감이 좋고 똥이 나오지 않아, 잃어버리면 같은 걸 여러 개 사둬야지 했던 볼펜이다. 며칠 동안 가방에 보이지 않아 아쉬워하고 있을 때. 그로 인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같은 자리 같은 메뉴만 주문하는 단골의 물건이라서가 아닐 것이다. 나에게 사소한 무엇 하나가 남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돌려주기 위해 기다리는 일 또한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누군가에 대한 예의라는 걸 그는 알았을 테다.


나를 알았던 사람보다 때론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받는 의지가 크다는 걸 건네받은 볼펜 하나가 알려줬다. 내가 쓰거나 버려도 또는 다른 이에게 주어도 상관없을 물건 하나를 고이 간직하는 마음에서 사소한 따뜻함을 느낀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주인공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 왕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전략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지. 난 그런 방법으로 살아남았어.”

...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20230801_231920.png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3) 중



에블린은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 눈을 붙여주고 소중히 대하는 남편이 한심하기만 하다. 남편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쓸모없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정함’으로 무장한 채, 티 나지 않게 소중한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나름 전략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남아 온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스치는 인연에서부터 묵묵히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까지 다정함을 전염시키며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영화에서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는 선택을 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관계나 환경에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선택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와 다정함을 건넨다면, 행복한 결말로 살다 간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나날이 힘겨워지는 세상일지라도 우리의 일상은 집, 돈, 차가 아닌 어쩌면 뜻하지 않은 따뜻함 하나로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사소한 따뜻함을 주고받으며 나이를 먹다 보면, 스스로 못살게 굴거나 다그치는 일 없이 나 또한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정중함과 예의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될 거라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사소한 따뜻함이야말로 일상을 지배한다.’


혼자라 느낄 때 이 말을 자주 불러냈으면 한다. 서로가 조금 더 다정해지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타인을 위한 다정함이 스스로에게도 건네지길. 그리고 점점 더 나은 세계가 되는 희망을 모두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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