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의미와 개념
협회 보수교육 중에 추천받은 '장애와 인권'<인권의 의미와 개념> 강의를 들었다. 이런 교육을 들음으로써 작업치료 현장에서 하게 되는 치료 경험을 보다 객관화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 같다.
키워드 : 장애를 만드는 사회 disabling society, 자기 결정 self-determination, 협력관계 partnership, 기회 opportunity, rist, 사회통합 inclusive society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인권과
내가 생각하는 장애인의 인권의 간격만큼 인권침해가 발생한다
강의 서두에 나온 이 문장은 인권 침해의 본질적 원인을 정조준하게 해 준다. 사회가 기대하는 인권(감수성)보다 전문가 집단이 보이는 인권(감수성)이 낮게 되면 사회적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장애인을 일상으로 만나는 작업치료사로서 단단히 새겨둘 내용이었다. 더불어 인권에 대한 개념과 사회적 기대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변화의 흐름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도 도움이 되었다.
인권(감수성)에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장애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손상을 장애로 정의하게 되면 장애를 개인의 의료적 문제로 국한하여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애인을 보호나 복지가 필요한 존재로 여길 뿐 삶의 주체로서 보지 못하게 된다.
장애인은 그가 있는 구조와 사회관계에 의해 장애화(disabled) 되는 것
반대로 손상이 장애가 돼버리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와 문화가 장애다'라는 정의를 견고히 세우게 되면 장애인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방법론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업치료사의 역할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작업의 주체로서 자립생활을 가능하도록 중재하는 것이 작업치료사의 주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인권 실천 패러다임 변화 흐름에서 핵심은 자기 결정이다. 전문가 집단이 장애의 정도와 그로 인한 차별, 배제, 억압을 연구(평가) 한 후 제공하는 복지서비스에는 당사자의 선호(preference)를 담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손상은 그 사람의 일부이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전문가 집단이 결정하는 복지의 한계는 장애인 당사자가 벗어나고 싶은 차별, 배제, 억압의 우선순위와 구체적인 내용이 모두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데 있다.
일상에서 사소한 결정을 많이 해보아야
중요한 결정의 내용도 이해하게 되고 합리적 결정도 기대할 수 있다
작업치료사는 클라이언트가 의사결정에 참여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risk를 관리함으로써 사소한 결정에서부터 점차 무게감 있는 의사 결정에 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중재해야 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야만 장애인 당사자는 자기 결정 능력을 기를 수 있고 점차 자기만의 선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는 한 사람의 인권을 지켜내는 매우 사소하지만 인권 친화적인 치료행위이다.
<사례>
최근에 방문 서비스에서 만난 클라이언트와 보호자에게 드린 제안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클라이언트는 3년 전 오른쪽 편마비 진단을 받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고 있었다. 식사는 건측으로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먹도록 숟가락을 주면 흘리고 흘리게 되면 치워야 하는 보호자의 번거로움 때문에 그냥 먹여준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아주 사소해 보이는 ‘원하는 반찬을 고르기', '원하지 않는 반찬 먹지 않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자기 결정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케어를 맡은 가족이나 클라이언트도 이런 생활패턴에 적응하게 되면서 당사자의 자기 결정권은 점점 소멸되고 결국 보호자의 선호가 클라이언트의 선호를 대체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자기 결정권의 소멸은 작업적 존재로서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작업치료사는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 하더라도 의사결정에 반드시 클라이언트가 참여할 수 있도록 초기 치료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중재해 나가야 한다. 나는 클라이언트에게 건측으로 숟가락질 나아가 (에디슨)젓가락질으로 식사하는 것에 대해 의사를 물었고 긍정의 답변을 들었다. 보호자에게 사소해 보이는 식사하기를 온전히 자신의 일부로 가져가게 될 때 반드시 또다른 사소한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말씀드렸다.
인권은 '그 다움'이다.
작업치료실에서 우리는 장애인 인권 문제와 늘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그 방향으로 살고자 한다. 치료실에서 만나는 우리의 클라이언트도 마찬가지다. '그다움'이 되려면 작업치료의 목표와 내용이 그에게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강의 때 '동기가 없는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어떤 이유가 그를 의욕이 없게 하고 치료동기를 떨어뜨리게 했는지 원인을 안팎에서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다움'을 지향하고 그 '자기다움'은 무언가 하고 싶고 해 내고 싶은 작업적 욕망을 가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장 뚜렷한 치료 목표가 잡히지 않더라도 괜찮다. 치료사가 클라이언트의 의사를 묻고 확인하려는 배려의 태도만으로도 그의 인권은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클라이언트의 의사와 관계없이 치료사 판단으로 진행하는 치료가 더 인권침해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험으로 볼 때, 치료사로부터 의사결정의 참여자로 포함되어 보았던 그런 존중을 받아본 클라이언트는 치료사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언젠가 자신을 표현하고 작업적 동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혹 내가 치료할 때 또렷한 의사표현으로 자신의 선호를 밝히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인권은 상대가 어떠하든 지켜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업치료사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 그걸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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