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리츄얼
20년도 육아휴직은 나의 인생에 여러 변화의 시작이었다. 작업공방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그중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느리게 사는 법을 몸으로 익혀간 것이다. 나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늘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잘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육아휴직의 1차 목적인 '육아'보다도 좀 더 여유 있는 나만의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코로나19 전염병이 시작되던 첫 해였고 세웠던 계획대로 된 일은 거의 없었다. 새로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그때 한 권의 책이 '이제 몸을 챙깁니다'였다.
몸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든 방치하든 사람들은 정작 일상에서 몸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위장은 배가 부르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계속 음식을 먹는다거나, 몸은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계속 무시하고 일이나 운동을 하거나, 체력은 10분 뛰는 것도 버거운데 머리로는 두 시간을 뛰어야겠다고 계획하거나, 몸은 상대와 있기 싫은데 웃으며 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런 몸과 마음의 단절이야말로 심각한 자기 분열이며, 현대인들의 심신을 교란시키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제 몸을 챙깁니다' (문요한)
책에 서두에 나온 이 문장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치 연식이 오래된 중고차를 막 굴리는 사람처럼 내 몸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저자는 무엇보다 몸을 느끼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데에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리고 걷기와 요가 활동을 추천했다. 그렇게 나는 생전 운동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요가를 시작했다. 기록을 재며 스스로 경쟁을 멈추지 않았던 내가 걷기 시작했다.
실제 걸어보니 새롭긴 했다. 숫자 기록에 얽매이지 않는 사실에서 자유로웠다. 빨리 달릴 때에는 보지 못한 풍경을 볼 수 있었고 풀벌레 소리와 노을 진 하늘도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매번 달려 다녔던 길에 생긴 맛집도 보게 되었다. 걷는 즐거움을 느끼며 나처럼 걷는 사람이 또 누가 있나 찾아보기도 했다.
하정우도 걷는다니. 반가웠다. 배우 하정우는 해외든 지방이든 촬영지를 정하면 그 주변을 걷는다고 했다. 멋있었다. 걷는 활동은 복잡한 머리를 쉬게 하는 시간이며 여백을 주는 시간이었다. 육아휴직 때 걷는 활동의 유익과 즐거움을 맛보았으니 복직하면 점심때마다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21년도부터 사실 실천하고 있는 나만의 점심 리츄얼이 되었다.
혼자 걷을 때가 많지만 후임 중에 대화를 하고 싶거나 하면 내가 요청을 해서 함께 걷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 점심때 잡무를 처리하거나 잠을 청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주는 못하지만 이렇게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너무 유익하고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때문에 어렵겠지만 점심때 병원 주변을 직원들과 함께 걷는 일상도 상상했었다. 그날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점심시간 나만의 리츄얼로 오전과 오후의 반복되는 무의미할 수 있는 일상을 좀 더 의미 있게 받아낼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음 주에도 걸을 것이다. 이병원을 퇴사하기 전까지 걸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