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물리쳐야 할 재활의 적은 병원에 익숙해지는 것
입원 클라이언트와 옷 입기 훈련을 하고 있다. 환자분이 거울을 보다가 (들리는) 혼잣말을 내뱉는다. "몰골이 말이 아니네", "나 원래 이렇게 지질하지 않았는데" 하신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과 비교해 지금은 너무도 처량해 보이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란한 마음이 왜 안 들겠는가. 환자복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몇 달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으니 이런 마음이 안 들래야 안들 수 없다.
클라이언트의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야기 토픽 하나가 떠오른다.
환자복이 환자를 만든다
“어머님 아프시기 전엔 진짜 멋지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치료실에서 가만 보니까 환자복이 진짜 환자를 만들더라고요. (끄덕끄덕 하신다)
여기 실습생도 보세요. 밖에서 만나면 못 알아봅니다ㅋㅋ 아이보리 면바지에 흰색 티셔츠 이 옷이 ‘실습생’이라는 딱지를 붙여 버리는 거거든요. 치료사도 마찬가지고요."
(옷 입기 훈련을 하다가 가만 치료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
"어머님도 환자복 벗고 외출복 멋지게 입고 화장도 하고 그러면 더 이상 환자가 아니라는 의미예요."
(표정이 조금 더 밝아진다)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시면서 치료 기간이 길어지면 환자복이 더 편하다는 분들이 있어요. 단순히 옷의 문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마음가짐도 환자처럼 돼버린다는 거예요."
(끄덕끄덕)
"어떤 분 중에는 1년 가까이 병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병원이 더 편하다고 집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실제로 주말에 집에 한 번 가봤는데 너무 불편해서 다음부터는 병원에만 있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해가 된다는 끄덕끄덕)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재활을 받는 건데 집에를 안 가려고 하는 상황, 앞뒤가 바뀌어 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 의외로 많아요. 정말로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재활은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예전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준비하고 훈련해가는 것이에요. 내가 스스로 하려는 건 없고 치료를 그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인드가 병원복이 만들어 내는 대표적인 환자 마인드라고 생각해요."
(어쩌다 상담이 교육이 돼버리고 있는 상황... 그래도 집중해서 들으신다)
"지금 재활받는 목표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내가 지금도 온전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간병인의 최소한의 도움을 받으면 할 수 있는 것(=연습을 조금만 하면 할 수 있는 것), 완전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다시 생활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가 구체적으로 나올 테니까요. 치료사가 알아서 해주겠거니 생각하기 때문에 막연한 재활이 되는 것 같아요."
(대화는 다시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그런 면에서 어머님은 조금 연습하면 해낼 수 있는 옷 입기라는 과제를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몸에 익혀가고 있으니 100점짜리 아니 200점짜리 작업치료(재활) 받고 있는 거예요. 이런 시도가 많아질수록 집에 갈 몸도 마음(자신감)도 함께 준비하게 되실 거예요."
(끄덕끄덕 씩 웃으신다)
하다 멈춘 옷 입기를 깔끔하게 완료하고 치료사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주말에 아들한테 집에 좀 가보자고 해야겠어."
"좋아요~ 다녀와서 뭐가 불편했는지 뭐가 필요하겠다든지 이야기해주시면 제가 치료시간에 도와드릴게요."
'나중'이 아니라 '지금'을 살게 하는 것
재활병원들의 내부 환경이 좋아지고 있다. 덕분에 입원 기간 동안 클라이언트는 편하게 생활 한다. 치료사로서 아쉬운 점은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가끔 가는 집은 상대적으로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재활병원의 치료 환경이 좋다는 말은 내부 환경이 좋다는 말과 다르다. '재활'을 구글링 하면 '다시 활동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재활병원의 존재 목적은 클라이언트가 다시 생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전하고 편리한 환경보다 퇴원 후 생활에 보다 빨리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환경이어야 한다. 일상생활치료실을 굳이 만들고 일상생활훈련을 하는 이유도 이런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작업치료는 불편함으로 클라이언트를 끌어내는 게 아니다. 퇴원 후에 자신이 돌아갈 생활에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작업을 보호자와 치료사에게 미루고 맡겨버린 만큼 자신만의 삶의 색체가 희미해져 간다는 의식을 깨워주어 '자기답게' 살도록 돕는 것이다. 비록 아주 작을지라도 자신의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나중'이 아니라 '지금'을 살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