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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필 Oct 06. 2021

거짓된 페르소나와 당당한 맨얼굴

-강신주, 정유정의 글을 읽고




 철학자 강신주.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그러니까 당시의 정치 혼란기만큼 혼란했던 나의 20대 중반이었다. 세상이 혼란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메시아를 바라고 또 그에 호응하듯 사기꾼들이 득세한다. 따지고 보면 2014년은 정부 자체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사기꾼 집단이었으니 가짜가 판을 쳤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엔 자식 잃은 부모들의 곡소리가 가득한데 북악산엔 풍악소리만 가득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희망도 없었다. 미래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한 혼란기에 내가 의탁한 것은 다름 아닌 ‘인문학’이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나뿐만 아니라 책깨나 읽는 사람들이라면 이 인문학 열풍에 동참했으니 당시에 강신주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그가 나오지 않은 강연은 없었으며 그의 강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각종 서적 사이트에서 그의 책은 늘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유튜브에서 그가 출연한 영상의 조회수도 폭발적이었다.


 그는 인문학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랑과 자유의 학문이라고. 그래서 인문학은 아픈 것이라고.



 p.590 사랑에 대해 강의할 때 사람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행복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불행에서 온 통찰이다, 그게 더 리얼하지 않냐? 행복하면 사랑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행복을 성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져 있다는 거다.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다.’…(중략)… 철학이 필요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판단은 각자가 해라. 그른 얘기면 지키지 말고, 옳은 얘기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리고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덧붙이죠.

 그런데 옳은 것을 관철시키려고 살 때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죽을 때 얼마나 편한데요. 옳은 것을 지킬 필요가 없고, 옳은 것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게 안식이죠….(중략)… 제대로 산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산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못 산 인간들이 생명 연장을 꿈꾸죠. 왜냐하면 옳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예요. 그래서 반체제적이고,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온한 거죠. 사랑과 자유의 힘을 믿을 때 우리는 강해져요. 반대로 제대로 사랑을 못 할 때, 인간에 대한 근본적 신뢰가 붕괴되어버릴 때 사적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관계에서도 절망이 오는 거예요.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어요. 사랑하는 사람만이 구속이 뭔지 느끼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귀가 시간을 어기게 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옛날에는 엄두도 못 냈던 사람들, 깡패들과도 싸워야 해요. 사랑을 하면 자유롭고 강해져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요. 사랑과 자유가 동의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사랑과 자유는 같이 가요. 개인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층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바치는 헌사예요. 그래서 저도 제가 하는 인문학을 하기 더럽게 힘들거든요. 흉내만 내느라고. 다행히 제게는 김수영이 있었어요. 그리고 김수영과 바이런, 니체와 장자, 기타 여러 진정한 인문학자들 사이의 공통점이 뭔지를 안 거죠. 그들이 어떤 디테일을 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관통하는 정신이 중요한 거고요.

 어쨌든 제 독자들이 그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인문학을 평가하는 잣대도 거기에 있어요. 다른 가치들은 없어요. 인간이 죽지 않는 이상 사랑과 자유가 가장 중요하죠. 이게 마지막 말이에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슬프다.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다.’

 나는 자유의 힘은 믿지만 사랑의 힘은 믿지 못한다. 그것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믿기에는 아직 불신도 많고 이기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다.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이 책은 인문학을 알고 싶지만 그리고 철학을 공부해보고 싶지만 도전해보지 못하고 망설였던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말 그대로 사람들은 철학 혹은 인문학이라는 키워드만 들어도 보이지 않는 엄청난 진입장벽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은 2013년에 초판이 나왔기 때문에 지금의 정서나 사회문제와 조금은 다른 포인트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죽어서도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나 보노보노처럼 살지 않아도 다행이라 말해주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하는 자신의 맨얼굴을 마주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그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헤쳐나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정신’ 이기 때문이다.

 정유정 작가는 ‘완전한 행복’에서 ‘유나’라는 거짓되고 병든 자아를 가진 인물을 배치해 우리가 갖고 있는 거짓된 자존감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하고 있다. 어설픈 자존감은 오히려 나와 사회를 병들게 한다. 강신주의 책은 우리에게 거짓된 자존감, 이기적인 자존감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생날것의 부족하고 못난 부분을 마주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만큼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마주하는 것은 굉장한 아픔이 동반되는 일이다.



 20대의 나는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서, 무엇인가 있어 보이고 싶어서, 무엇처럼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다. 맨얼굴보다는 거짓된 자아로 상대를 대했고 그것이 성공했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왠지 모를 허탈함이 몰아쳤다. 시간이 흘러 여지없이 맨얼굴이 드러났을 땐 상대방은 당황했고 도망쳤다.



 그래. 도망가라지. 난 내 옆에 있는 내 사람만 생각하고 살면 되니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p. 108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persona)라면, 후자는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거짓된 인문학은 여러분에게 더 두텁고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할 것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한다.



 2021년.

 역병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은 2014년과 같은 혼란기는 아닌 것 같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014년과 비교하면 나의 삶은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듯.

 적어도 ‘무엇인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지는 않게 된 것 같다.

 편안하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굳이 있다면 아마 부족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랄까.



 어쩌라고. 이렇게 생겨먹은걸. 찌발.



이 자세로 꿋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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