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1)
너의 눈빛에 나의 맘은 금이 가고 너의 말투에 내 맘은 와장창 다 박살 나고 너를 미워하고 비워내도 친구를 붙잡고 욕을 해도 혼자 끝내는 오늘까지도 넌 너무 예쁘구나
박원 <나를 좋아하지 않는 그대에게> 중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그것.
바로 짝사랑.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딱 내가 좋아하는 그만큼만 나를 좋아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얄궂게도 그런 행운은 우리에게 잘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꼭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기에
나에게는 소중한 이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고작 흑심에 불과할 수도.
도달하지 못한 마음이 떨어진다.
홍대역에서 카페 공명을 지나 동진 시장까지.
동진 시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작지만 특별한 연필 가게가 나온다.
아기자기한 연필 가게의 이름은 '흑심BLACK HEART'.
지도를 보며 걸어도 가게를 한 번에 알아보기는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편집샵이나 문구점이 1층에 있는 것에 비해 '흑심'은 1층이 아닌 3층에 위치해 있고 건물의 외벽에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간판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 온 방문객은 예상치 못한 정비소 간판에 당황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괜찮다.
정비소를 찾았고, 그 앞의 작은 초록색 간이 간판을 발견했다면 목적지인 흑심에 잘 찾아왔다는 증거니까 너무 당황하지 않아도 좋다. 약간은 어두컴컴한 입구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가면 오른편에 두꺼운 철문이 보인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래된 연필 냄새가 가득한 흑심의 공기가 방문객을 반겨준다.
오히려 누구나 쉽게 방문하기는 어려운 곳이다 보니, 비밀 보물 창고 같은 이곳.
이미 연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곳이고, 최근 들어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 중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날들이 기대가 되는 곳이다.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다양하다.
즉, 한창 연필을 사용하는 어린이들만 오는 것이 아닌, 애플 펜슬, S펜을 더 자주 사용할 법한 성인들도 이곳에 자주 방문한다는 것이다. 대체 흑심의 어떤 점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끌게 만드는 걸까.
연필을 만드는 세계는 작은 우주다.
<가장 작고 사소한 도구지만 가장 넓은 세계를 만들어낸 -연필> P.542
지난 7개월 동안 이곳에 4번이나 방문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래, 바로 나다.
우리 집에서 흑심까지는 1시간이 훨씬 넘게 걸린다. 나는 왜 연필 한 자루를 사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오는 걸까.
아무래도, 공간이 주는 따스함때문인 것 같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할 수도 있고, 연필을 파는 다른 매장도 많이 있지만 적황과 감색 그 언저리 톤의 가구들이 옛날 우리네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흑심의 주인장 두 분은 연남동으로 가게를 옮기면서 모든 것을 직접 인테리어 하셨다고 한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셀프 인테리어는 하기 쉽지 않은데, 인테리어 전문가가 자신들만큼이나 자신들의 공간에 대해 이해하고 설계해줄지 의문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세 번째 흑심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페인트칠부터 조명 설치까지 하나하나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시필 공간도 늘려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연필을 써보고 다양한 연필을 즐겨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취향이 가득 담긴 흑심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그들.
연필은 집 어딘가에 하나씩 굴러다니는 물건이다.
혹은 매년 열리는 다양한 도서전이나 각종 행사에서도 기념품으로 나눠주기 무난한 것도 바로 이 연필이다.
개인적으로 일의 특성상 연필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연필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됐다. 어릴 때는 어린아이의 상징처럼 느껴졌던 이 연필이 어찌나 싫었던지. 고학년의 상징이자 조금 더 큰 어른의 상징인 '샤프'를 쓰게 될 날을 고대하며 불편하고 관리하기 귀찮았던 연필을 천덕꾸러기 취급을 했다.
그러던 내가 이제와 연필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될 줄이야.
아이들의 감상문을 학원에 구비되어 있는 연필로 첨삭을 해주다 보니, 어느 순간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나만의 연필이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은 많았으니, 그중 하나를 갖고 올 법한데 그것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연필이 갖고 싶었다.
그날은 장미가 유난히 풍성하게 피어있던 5월 19일이었다. 나는 연필 한 자루를 사기 위해 연남동으로 향했다.
공간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에 연필, 지우개, 연필 홀더, 연필 마개, 연필깎이 등 연필의, 연필에 의한, 연필을 위한 도구들이 한가득이었다.
차르르르.
비커와 연필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연필과 연필을 도와주는 도구들로 가득한 이 작은 곳에서 자그마치 1시간 동안을 헤매었다.
다양한 연필들 중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단연 페룰(ferrule)이 있는 연필들이었다. 페룰이란 쉽게 말해 연필과 지우개를 연결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20세기 초에는 이 페룰이 굉장히 화려했고, 브랜드마다 이 페룰에 굉장한 공을 들였다고도 한다. 구매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진에 보이는 노란색 몸통의 초록 페룰이 특징인 DIXON사의 제품도 독특한 페룰로 유명했다고 하니 예쁜 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마음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연필은 페룰이 독특한 블랙윙Blackwing 제품이다.
블랙윙 제품은 특유의 납작한 페룰과 지우개가 유명한 연필인데 분기마다 고유의 번호를 부여한 한정판 연필을 출시해 나름 마니아층이 두터운 연필이다.
사람의 눈이 비슷하다고 느꼈던 게, 학원에서 이 연필을 쓰고 난 뒤 이 연필에 대해 물어보지 않은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쁜 연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아이들도 너도나도 한 번씩 써보고 싶어 하니 아이나 어른이나 예쁘고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연필은 펜만큼이나 강력한 은유이며, 깃발만큼이나 풍부한 상징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연필을 그들 작업에 필수적인 도구로서 아꼈으며, 심지어는 이 드로잉 도구에 일체감을 느끼기도 했다.
<가장 작고 사소한 도구지만 가장 넓은 세계를 만들어낸 -연필> P.18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는 특별히 숙제를 더 내주는 편인데 군말 없이 날짜에 맞춰 과제물을 해오는 아이들이 대견해 흑심에서 사온 연필을 특별 선물로 준 적도 있었다.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연필을 받은 아이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연필 한 자루에 그저 이름만 각인했을 뿐인데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해지는 마법.
연필이 대체 뭐라고 우리는 연필 한 자루에 이름을 새기며 아끼고 정성스럽게 쓰는 걸까.
종이책처럼 연필의 생명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연필은 600페이지짜리 책으로 서술할 만큼 여전히 특별한 것이다.
연필을 쓰는 세대와 연필이 멀어진 세대가 이 따뜻한 공간을 계속해서 방문하고 사용한다면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옛날의 것이 그저 고루한 것이 아닌 특별한 것으로 재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더 특별한 연필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