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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필 Dec 29. 2021

#7 크리스마스이브가 생일

이번에도 먹혔다.




어렸을 땐 크리스마스이브가 생일인 게 좋았다.



누구보다 특별한 내 생일.


기억하기가 쉬워서 그랬을까. 요즘처럼 카카오 톡으로 친구의 생일을 챙길 수 없었던 시절이었는데도 친구들은 잊지 않고 생일 축하 연락을 해주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크리스마스이브가 생일인 것이 꽤나 귀찮은 일이 돼 버렸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가 연말 대목 중에 하나이다 보니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붐볐고, 어딜 가나 예약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생일이니까 뭔가 특별한 하루를 보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때문에 크리스마스이브로부터 내 생일을 지키기 위해 처절히 노력했다.



물론 생일이라고 꼭 특별하게 보낼 필요는 없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책임감이 우리를 짓누르게 되면 생일은 그냥 으레 지나가는 날정도로 생각할 수 있건만. 그놈의 크리스마스 시즌이 뭐라고 평범하게 보내고 싶은 나의 마음을 자꾸 설레게 한다. 12월 초에는 '진짜, 올해 생일은 그냥 넘어간다.'  다짐해보지만 생일이 가까워질수록 인터넷에 올라오는 온갖 크리스마스 패키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솔깃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날이 날인만큼 모든 게 돈이었다.



20대 때는 생일을 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누구보다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집중하다 보니 이 계획이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짜증부터 치밀어 올랐다.


호캉스나 제주도 여행이라도 가려고 하면 비행기 값과 숙박비는 몇 배로 뛰어올랐고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겠다는 커플, 가족과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연말 특수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배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귀찮게 생일을 챙겨야 하나 하는 정신승리까지 들게 됐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올해도 여느 해처럼 생일을 적당히 보내겠다는 다짐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 세계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연말 뽕을 잔뜩 맞은 상태에서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스님에게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 대통합. 국힙 원탑.






 그래, 생일이라고 꼭 어디 갈 필요는 없어. 케이크 하나만 있으면 돼. 케이크만 특별한 걸로 사자.




집안 식구들 중 케이크 같이 달달한 것을 먹는 이는 나뿐이기에 평소에도 케이크가 먹고 싶으면 커다란 케이크가 아닌 조각 케이크로 달달함을 채우곤 했다.





이번 생일은 특별한 케이크 하나와 디즈니 플러스. 그 둘로 충분해.





평소에 먹고 싶었지만 사 먹기에 부담스러웠던 케이크 업체의 목록을 뽑아 예약 문의를 해보았다.





다음날.


업체의 봇에게서 연락이 왔다.









문의를 한 날짜는 12월 8일.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일반 케이크를 판매하지 않는다니.

게다가 그렇게 나온 케이크마저도 예약 마감이라니.





현장 판매분을 노려봐?



하지만 해당 업체는 직장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라 퇴근 후 수많은 인파를 뚫고 갔다 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모험이었다.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목록의 다른 케이크 가게에 연락을 해보았다.




'저희는 해당 기간에 시즌 케이크만 팔아서...'




이곳도 마찬가지.



가게의 위치는 갈만한 곳이었지만 다 먹지도 못할 크기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일반 케이크 값의 1-2만 원이나 더 주고 사기엔 뭔가 아까웠다.




몇 군데 더 문의를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내가 원하는 크기와 가격대의 물건은 죄다 예약 마감.





프랜차이즈 빵집 케이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일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빵집 케이크보다는 특별한 모양의 특별한 케이크를 먹고 싶었다. 이번 생일은 어디 가지 않고 집에만 있을 건데 케이크 하나 먹고 싶은 것이 그렇게 큰 욕심인가 싶어 괜히 울적해졌다.




벼르고 별렀건만 이렇게 또 크리스마스이브에 생일을 뺏기고 말았다.










생일날. 결국 약속을 잡았다.



엄청난 추위를 뚫고 길을 걷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가득했다.





내 안의 장발장이 케이크를 훔쳐 달아나자고 속삭였지만 이제는 됐다고 말해주었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겠다.









케이크를 얻지 못해 호캉스를 예약했다.

물론 24일, 25일은 만실이라 26일-27일 일정으로 예약.



내가 사랑하는 종로에서의 호캉스로 케이크를 얻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결국 적당한 생일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올해도 지키지 못하게 됐다.







아... 크리스마스이브에 생일을 또 먹히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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