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토스트

by 수지리

프렌치토스트는 왜 ‘프렌치’가 붙었을까. 이 음식은 놀랍게도 고대 로마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오래되어 딱딱해진 빵을 재활용하기 위해 계란과 우유에 적셔 튀긴 음식이다. 'French toast'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1800년대 미국 뉴욕의 한 신문 광고에서라고 전해지지만, 1724년에 미국에서 활동하던 한 요리사 조셉 프렌치(Joseph French)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French's toast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 음식 이름에 대한 여러 가지 설화가 있는 건 그 음식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프렌치토스트를 먹을 때, 나는 그 옛날 언젠가 진짜 살아있었을 수도 있는 조셉프렌치와 그의 음식점을 상상해 본다.


아침에 프렌치토스트를 해주실 때면 엄마는 뽀얀 식빵을 계란과 우유를 푼 물에 담갔다가 폭신해지면 버터가 녹은 잘 달궈진 팬에 올려 노릇노릇 구우셨다. 엄마는 수동 휘핑기를 이용해서 스뎅볼에 계란과 우유를 잘 섞으셨다. 왼손으로 스뎅볼을 잡고 오른손으로 휘핑기를 손목 스냅을 주며 돌리던 모습은 어린 딸의 눈에는 마치 숙련된 기술자 같았다. 그렇게 잘 섞인 계란물에 소금 간만 해서 식빵 안쪽까지 촉촉하게 먹인 뒤 노릇하게 구워 설탕을 솔솔 뿌리면 샤르르 녹아 먹을 때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어린 나는 계란을 깨는 일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쉬운 게 당시에는 껍질을 깰 때 침을 몇 번씩 꿀꺽 삼키고 나서야 가능했다. 한 번에 힘을 줘서 깨트리지 않으면 껍질이 자잘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다.

식빵은 적당히 두꺼울수록 맛있었다. 잘라서 한입 두 입 먹다 보면 두 개는 금방 순삭이었다. 요즘 브런치 집에 가면 도톰하게 썬 식빵에 슈가파우더를 뿌리고 메이플 시럽을 뿌린 프렌치토스트가 나온다. 엄마는 훨씬 소박하게 만드셨지만, 어릴 적 먹던 프렌치토스트는 최고의 럭셔리 아침 메뉴였다. 소시지나 베이컨을 구워 곁들이면 더 근사했다. 프렌치토스트를 뒤집개로 파닥파닥 뒤집던 엄마의 뒷모습이 기억난다.

한국에 브런치라는 카테고리가 유행하고 한집 걸러 한집 브런치카페가 생겨나기 전부터 나는 프렌치토스트를 자주 해 먹었다. 방법이 워낙 쉬웠기 때문에 결혼 전에 잠시 혼자 살던 원룸에서도 아침식사로 해 먹곤 했다. 먹다가 남은 식빵이 상하기 전에 냉장고에 넣었다가, 딱딱해지면, 계란 두 알을 톡톡 깨서 우유와 함께 섞어서 그 안에 빵을 퐁당. 프렌치토스트는 정말 맛있다. 휘핑기도 필요 없다. 난 포크만 있어도 계란물을 잘 만든다. 나는 계란물을 풀 때마다 엄마 흉내를 내듯 손목을 돌린다. 가끔 무엇인가를 잘하기 위해선 잘하는 사람 흉내를 내는 게 가장 쉬울 때가 있다. 나는 요리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용기가 필요할 때, 엄마를 생각하며 가슴을 펴고 입꼬리를 올린다. 우리 엄마는 항상 입꼬리에 힘을 주고 계셨다. 그리고 배가 나온다며 집에서는 홈웨어도 입지 않으셨다.

프렌치토스트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침메뉴 중 하나다. 계란도 좋아하고 빵도 좋아하니, 그 조합은 항상 찬성이다. 게다가 그 이름이 주는 멋스러움 때문도 있고,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썰어먹는 기분도 고급지다. 물론 어려서 나는 프랑스에서 자주 먹는 토스트라서 프렌치토스트라고 생각했기 때문도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그랬던 것 같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회사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잠을 줄이고도 시간이 부족했던 딸을 위해 엄마아빠는 학교 후문 쪽에 작은 원룸 아파트를 구해주셨다. 나는 주중에는 그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다녔으며, 주말에는 부모님 집에 가서 지냈다. 공부할 게 너무 많을 땐 가끔 주말에도 거기서 지냈는데, 그 방은 해가 잘 드는 남향이었다. 아침이면 수업 시작종이 울리는 학교가 가까이에 있었고,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면 학교후문과 기숙사 건물들이 보였다. 9시 수업에 맞게 등교하려면 부모님 집에서는 7:40에는 나가야 하는데, 원룸에서는 8:40분에 마을버스를 타도 넉넉했다.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벌었기에, 한동안 난 계란 후라이나 프렌치토스트 같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요리를 해 먹었다. 혼자 살며 내 부엌에서 나만을 위해 요리하는 것을 또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땐, 난 이미 그 시간마저 잠과 바꾸었고, 정신없이 잠을 자다 헐레벌떡 학교에 갔다. 그 방을 빼던 날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엄마는 암수술 때문에 입원해 있었고, 집주인 할머니는 가스레인지가 왜 이리 지저분하냐며 투덜대셨다. 나는 엄마가 아프셔서 빨리 가봐야 한다고 했고, 집주인은 그래서 가스레인지가 지저분했구나 하셨다. 나에게 엄마는 따뜻한 밥상이었지만, 가끔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아픈 구석이기도 했다. 그래서 엄마를 보면, 기쁘고 동시에 슬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따뜻하고 좋은 기억이 더 많지만, 한편으론 슬프고 짠하다.

내가 방을 뺀 며칠 후 엄마는 첫 번째 암수술을 하셨다. 수술은 아침 일찍 잡혀있었고, 그 전날밤 나는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자정이 훌쩍 넘어 퇴근했다. 그때 난 엄마 회사일을 돕고 있었는데, 그날 밤은 백화점 매장에 디스플레이를 바꾸는 날이었다. 일이 끝나고 퉁퉁 부은 다리를 올려두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깜짝 놀라 눈을 떴더니 아빠는 이미 병원에 가고 난 뒤였고, 난 너무 놀라 급히 시계를 보니 수술 10분 전이었다. 나는 눈곱만 떼고 병원으로 갔고, 수술실 앞으로 뛰어가보니 방금 엄마가 들어간 뒤였다. 그날 수술 시간은 영원처럼 길었다. 묵주기도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안절부절 시계만 보고 있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엄마는 눈을 겨우 뜨며,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수지... 보고 싶었어, 아침에..." 가슴속에 아주 큰 돌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 뻑뻑함. 나는 엄마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가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떤 느낌이었을까. 나를 찾았을 엄마의 눈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는 그 수술이 끝난 후 12번의 항암을 마치고 한 번의 수술을 더 하셨다. 12번의 항암마다 난 병원에서 엄마와 함께 잤다. 학교에서 일하다가 가기도 하고, 회사에서 일하다 가기도 했지만, 분명 병원에 가는 게 그럴 수 없는 일인데, 난 항상 일을 마치고 엄마 병실로 가는 길에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엄마의 목소리와 냄새가 있는 병실에 문을 열고 들어가 엄마 손을 잡고,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그 옆에서 잠드는 일은 뭔가 우리만의 여행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물론 항암주사로 인한 구역감과 싸워야 하는 엄마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지만, 매달 주사를 보며 엄마를 도와주는 친구가 왔으니 잘해보자 하며 그 기나긴 여정을 함께 했더랬다. 그러다 언젠가 일을 마치고 갔는데, 엄마가 아무래도 옆방에 중요한 사람이 온 거 같다며, 누굴까 궁금해하시던 날이 있었다. 엄마는 간호사들과 의사들에게 수많은 질문 끝에 옆방에 추기경님께서 입원하셨다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다음 날 엄마는 주사를 한 팔에 꼽고도 그 방에 문이 열리는 순간 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엄마는 그 이틀째날에 추기경님께 안수를 받고 얼굴이 발그레해지셔서 그 이야기를 무한반복하셨더랬다. 그러고는 며칠 뒤 병실에서 밤을 지내고 잠시 집에 와서 씻고 쉬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추기경님께서 퇴원하실 거니 얼른 오라고 하셨다. 알았다고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대모님이 선물해 주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십자가를 얼른 들고 병원 로비에 도착하니, 엄마에게 어디냐며 추기경님 이제 엘리베이터 타고 가신다고 빨리 오라는 전화가 왔다. 한쪽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있었고, 줄이 길었다. 얼른 그 옆 엘리베이터를 보니 지하 2층. 그러면 저 두 엘리베이터가 엄마와 추기경님이 있는 6층에 가는 시간보다 내 발이 빠르겠다 계산이 되었고 나는 서둘러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6층에 다다르자 난 숨이 턱까지 찼고,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니, 추기경님이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엄마는 추기경님께 나를 바로 소개하셨고, 나는 십자가에 축성을 받았다. 그 십자가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장 아끼는 십자가 되었다. 지금은 우리 집 현관 앞에 걸려있다. 엄마는 그날 내가 추기경님을 만난 건 기적이라고 했고, 엄마가 추기경님께 안수받고 함께 병원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축복이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음식을 먹고 나면 밤새 자느라 잠들어있던 장기들이 기분 좋게 깨어나는 느낌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프렌치토스트를 자주 해준다. 확실히 호밀빵보다는 보들보들한 우유식빵이나 버터식빵이 더 맛있다. 나는 설탕을 뿌리는 대신 메이플 시럽이나 꿀을 뿌린다. 멋 내서 지그재그로 뿌리고 나면, 나도 우리 엄마 같은 큰 사람이 된 기분이다. 난 계란은 꼭 아이들에게 깨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애들은 정말 신이 나서 톡톡 소리를 내며 계란을 스뎅볼에 깨트린다. 내가 쓰는 스뎅볼도 다 엄마가 예전에 쓰던 것들이다. 아이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건 참 의미 있는 일이다. 아침에 눈을 비비며 부엌에 들어와 성가를 틀고 냉장고문을 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엄마로 살기 위해 부엌에 들어간다.

프렌치토스트, 종이에 과슈, 2025 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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