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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May 05. 2023

어떤 100만 원

교직일기 1

 아이를 낳고 복직해 3월에 만난 아이들은 5학년이다. 우리 반에 몸이 비쩍 마르고 눈이 나쁜데도 안경을 쓰지 않는 아이, 그럼에도 유난히 밝게 인사하고 눈이 빛나는 아이가 있다. 어머니가 베트남에서 오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아이이기도 하다. 아이는 수련활동 희망 조사에서 돈이 얼마 드냐고 묻곤, 무료라서 내야 할 돈이 하나도 없다고 재차 듣고 나서야 안심하며 돌아섰다.


 얼마 뒤 한 장학재단으로부터 다문화 장학생을 선발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다문화 가정에서 초등학교 장학생 200명을 선발해 100만 원씩 장학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공문을 읽자마자 다문화이자 한부모 가정의 그 아이가 떠올랐다.


 장학금 신청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학생이 홈페이지에 먼저 신청해야 하는데 어머니도 아이도 컴퓨터 이용이 어려워 방과 후에 교실에서 회원가입을 하고 지원 신청서, 소개서를 작성했다. 마감 일주일 전 어머니에게 제출해야 할 서류를 전화로, 문자로, 포스트잇에 적어서도 전했지만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잘못 발급받아왔거나 누락된 증빙서를 발급받기 위해 지난 5월 1일 수업이 끝나고 아이 어머니와 주민센터를 방문했다.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서류는 가장 중요한 증빙자료인 건강보험 납부내역서였다. 본인이 직접 전화해 인증받고 팩스로 서류를 전송받아야 했기에 내가 도와드릴 수 없었던 데다 근로자의 날이라 건강보험관리공단 콜센터는 휴무였다. 어머니에게 다음날 오전까지 꼭 보내 달라 신신당부하며 콜센터 번호, 상담사 연결 단축 번호, 팩스번호를 적어드렸다.


 그러나 이튿날 오후가 되어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다음날은 마감일이라 서버 폭주 우려가 있어 그날 모든 자료를 업로드하려던 참이었다. 자기소개서, 신청서, 추천서 및 10여 가지가 넘는 증빙 서류들 검토도 해야 했기에 늦어도 그날까지는 납부내역서를 받아야만 했다. 오후 4시에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다. 콜센터 전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해 건강보험 어플을 깔아 전송하는 방법을 알려드렸다. 나도 어플에 같이 들어가 어머니와 통화하며 단계 하나씩 알려드렸다. 그러고 나서 팩스로 받은 납부내역서엔 1,2,3월 납부내역 중 1월 내역만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건강보험 콜센터와 장학재단에 문의했고, 미납되었거나 중간에 직장을 그만두면 지역의료보험 납부내역서를 따로 발급받아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다시 어머니와 통화해 1월에 직장을 그만둔 것과 미납금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됐다. 미납금을 납부하고 지역의료보험 납부내역을 발급하고서야 비로소 2,3월 납부내역이 보였다. 혼자 남은 행정실에서 마지막 서류를 팩스로 전송받고 나니 6시였다. 추천서를 비롯 다른 증빙자료를 스캔하고 업로드하고 나니 해가 다 저물었다.


 경쟁률이 8:1이라 선발될 확률보다 안 될 확률이 더 높은 장학금 신청과정은 이렇듯 쉽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어머니와 주민센터에 가고, 담당 공무원과 한부모 가정 지원에 대해 면담하고, 저녁에도 아이 어머니와 전화 통화하고, 추천서를 작성하는 중에 떠올린 것은 ‘아이 한 명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주저 없이 장학금 신청을 하게 된 건 지금의 나를 키워낸 것도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차가 있다는 이유로 차상위계층에 등록되지 못했다. 우리 집 사정을 딱하게 여겨 고등학교 2,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내 학비를 사비로 납부해 주셨고 그 사실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간 스승의 날에야 알게 되었다. 가난에 쫓기듯 공부하던 내가 교사의 꿈을 키운 건 어쩌면 다행한 일이었다. 다른 대학교에 비해 등록금이 저렴하다는 것, 졸업과 동시에 임용고사를 통과하면 바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교대의 크나큰 장점이었고, 나는 어릴 때부터 빨강머리 앤 만화영화를 보며 키우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1년 치 학비가 약 100만 원이었고, 교대 등록금은 한 학기당 약 100만 원이었다. 나는 교대도 4년 장학금을 받고 다녔기 때문에 등록금을 납부할 시기가 되면 내가 선물 받은 100만 원의 가치를 새겨보게 되었다.


 나는 어느덧 마흔의 중견교사가 되었다. 교직 생활 10년이 넘어서면 전문성이 저절로 키워지는 줄 알았건만 아직도 3월이 되면 여전히 신규가 된 기분이다. 아이들도, 맡은 업무도, 교육과정도 모두 바뀌기 때문이다. 지난 15년 간 사회가 크게 변동해 교육기관인 학교가 보육까지 떠맡아야 하는 이상한 현실 속에 살지만 그럼에도 학교에 서 있는 내게 변치 않은 게 있다. 마음속에 새겨진 100만 원의 가치다. 어떤 이에게는 100만 원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돈일 수도 있겠으나 어떤 사람에겐 환산이 불가능한, 오랜 시간 복리로 불려 가는 온기가 된다. 나에게 100만 원은 물가변동에 따라 하락하는 화폐가치가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내가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생님들이 보내주신 응원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스승의 날은 은사님들께 받은 마음에 감사하는 날이면서, 내가 받은 관심을 내가 만난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길 기도하는 날이다. 또한, 어렵게 컸던 아이들이 잘 자라서 주변의 도움을 되새기며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순환이 일어나길 바라는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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