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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김치불고기

한 번이라도 다시 맛보고 싶지만 다시는 먹을 수 없는 음식.

by 온오프

아이 셋을 홀로 먹여살려야 했던 우리 아빠의 나이는

그때 겨우 서른셋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어린 아빠는 그럼에도 성실했다.

아빠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했다.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아직도 어린 내 기억을 헤집을수록 선명해지는 건

아빠의 파스 냄새였다.

문장 그대로 뼈빠지게 일을 한 아빠는

우리를 먹여 살리고자, 삶을 버티고자

그 어린 나이에 최선을 다했다.

우리가족의 가훈은 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였지만

아빠는 오직 우리를 키우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다.

아빠의 시계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돌아가지 않았다.

오직 우리 삼남매를 키워내기 위해서만 돌아갔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빠는 우리를 위해 살았다.


그런 아빠의 무게를

그때의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허리가 뻐근하고 다리가 아파 끙끙대는 아들의 신음 소리를,

아빠 스스로도 내색하지 못한 그 고단함을,

엄마였던 우리 할머니만 알고 계셨다.

할머니는 지독히도 쓴 냄새가 나는 약초를 씻고 다듬어

냉동실에 물과 함께 꽝꽝 얼려두셨다.

그리고 그 얼음으로

아들의 퉁퉁 부어오른 발을 찜질해주셨다.

그 발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마음속으로 다짐하셨겠지.

한 푼이라도 아끼자.

내 아들이 피와 땀으로 버는 돈을

허투루 쓸 수 없다.


그 애달픈 마음을 알 턱 없는

어린 우리 입들은 늘 굶주렸다.

먹는 것에 대한 설움은

늘 우리를 배고프게 했다.


아침밥상에 꼭 막내동생 밥 위에만 올려지던 계란후라이.

미역 건더기만 가득한 내 국그릇.

소고기가 듬뿍 들어 있는 막내동생의 국그릇.

주름진 손이 골라주는 두툼한 생선살이

늘 막내의 숟가락에만 올라갔다.


그 작은 차이가

어린 내겐 지나치게 크게 느껴졌다.

나는 자꾸만, 자꾸만 배고팠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부엌을 바라본다.

캄캄함 속에서도 눈을 비비며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부엌으로 걸어간다.

후라이팬에 한가득 담겨 있는 김치불고기의 향이

코끝을 찌른다.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숟가락으로 뜨거운 밥을 한 술 뜬 뒤

젓가락 들 틈도 없이

손으로 김치불고기를 가득 집어 밥 위에 올려놓고

와앙— 한입 크게 넣는다.

흰 쌀밥에 잘 익은 김치 한쪽만으로도 밥도둑인데

두툼한 고기까지 더해졌으니

그건 참을 수 없는 야식이었다.


내일 아침 이 메뉴가 밥상에 올라오면

또 김치와 양파들만 내 밥 위에 올라오고

고기는 동생에게 한가득 올려지겠지.

그게 너무 선명하게 예상됐다.

그래서 나는 또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안에 우겨넣었다.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목구멍에 꽉 막혀버린 슬픔과 함께

억지로 삼켜낸 밥숟갈.

결국 그날, 나는 체해버렸었다.


그 날이

그 서러움이

자꾸만 생각난다.


김치불고기는 할머니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우리 동네에는 돼지를 도축하는 도축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상품으로 나가는 고기는 다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고

남겨지는 ‘뒷고기’를 할머니는 잔뜩 사 오셨다.

지금이야 뒷고기집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찾는 곳이 적었고,

가격도 저렴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그곳은 단골 정육점이었다.


아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그 아들 녀석의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할머니는

감자밭·고구마밭에 버려진 파지를 주으러 다녔고

남에 밭 한켠에 남는땅에서 밭을 일구어 채소를 키우기도 했다.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자 했던 할머니의 마음엔
막내가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5살에 어미 없이 커야 했던

그 어린 손주가 가여웠던 마음이

더 크게 자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
먹을 것이라도 하나 더 쥐여주고 싶으셨겠지.

그 작은 마음이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절절하다.


가을이 지나가면
이런 마음들이 더 서글퍼진다.

계절이 바뀌는 것뿐인데,
그 변화가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들춰낸다.


그리고 곧,
할머니를 보낸 겨울이 다가온다.


어느 날, 꿈에서 한상 가득 차려진

할머니의 밥상을 보았다.

산처럼 쌓여 있는 접시에 김치불고기,
보글보글 끓어가는 된장찌개.
고봉밥처럼 수북이 담긴 하얀 쌀밥과 계란후라이.
그리고 내 옆에 앉아,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까지.


그 밥상이 그동안 미안했다고 건네는
할머니의 조용한 사과 같았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의 밥상, 그리움..
그 모든 따뜻함을 떠올리며
나는 할머니의 김치불고기를 다시 만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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