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독성은 있는데 기본기가 부족한.. 뭔가 건강하지 못한 맛이에요. 약간 불량식품 같달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떨어진 날 제가 받은 혹평입니다. 처참했죠, 기분이. 수년간 연습한 제 기타가 불량식품 같다니. 그냥 콱 접시에 코 박고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더 가관인건, 한껏 풀이 죽어서 오디션장 계단에 앉아있는데 웬 여학생이 제 뒤에서 소리치더군요.
- 야 불량식품!
- …나 부른 거야?
- 그럼 너지 누구야.
심장에 대못을 박아두고서 뻔뻔하게 제 옆에 걸터앉던 그 애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입다 만 건가 싶은 몸집보다 훨씬 큰 교복에, 대충 묶어올린 삐죽삐죽한 반머리. 추노 같은 차림에도 눈만은 똘망똘망하던 그 모습에 저는 순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감정은 설렘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 너 기타 좀 치더라?
- …너 같은 아마추어 눈에나 그렇겠지.
- 뭐야. 너 설마 그 빡빡이 심사평 담아두면서 이러고 죽상으로 있는 거냐?
- …
- 야 그 사람이 나보고는 뭐라는 줄 알아? 새롭긴 한데, 금방 질리는 목소리래.
단맛 없는 사이다 같다나 뭐라나. 내가 봤을 때 그 인간 그냥 지금 배고픈거야.
지가 고든램지도 아니고. 노래 평가를 하라니까 왜 맛 평가를 하고 앉았냐고.
- …
- 야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원래 안 건강할수록 더 끌리고 생각나는 거야!
어? 술, 담배, 커피! 불건강이란 게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데.
자기 일처럼 성을 내주는 그 애의 모습에 사실 그날 받았던 상처는 그 자리에서 모두 깨끗하게 날아가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걸 감히 티 낼 수는 없었죠. 사춘기 자존심에.
- 그래서. 어쩌라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그.. 너, 나랑 2인 밴드 해볼 생각 없냐?
- 뭐?
- 나는 톡 쏘는 맛이 있고, 너는 묘하게 생각나는 맛이 있으니까.
우리 둘이 함께 하면 꽤나 멋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러고서 그 애는 벌떡 일어나, 일본 애니에나 나올 것 같은 자세로 제게 손을 내밀더군요. 그 반짝이는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 그니까 같이 해보자고. 너가 카페인 해, 내가 탄산 할게.
그렇게 저희의 밴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밴드 이름은 ‘탄산과 카페인’.
그 애는 노래를 불렀고, 저는 그 애의 뒤에서 기타를 쳤습니다. 초반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3년을 이 악 물고 버티고 나니 저희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기더군요. 홍대 거리에서 관객 한 명 없이 버스킹하던 저희는 어느덧 인디 밴드 플레이리스트에 가끔 등장하는, ‘아는 사람들은 아는’ 밴드가 되어있었습니다.
모든 밴드가 그렇듯, 저희 음악을 들어주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저와 그 애의 인지도는 점점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밴드의 얼굴은 사실상 보컬이니까요. 관객으로 가득찬 공연장에서 그녀가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부를 동안, 저는 그녀의 그림자를 지켜보며 기타를 쳤습니다. 그 애의 이름을 부르는 관객들의 응원을 박자 삼아.
간혹 사람들이 묻고는 했습니다. 억울하지는 않냐고. 억울하긴. 전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사실 그 애와 음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으니까요. 그 애가 이 밴드의 탄산이자 카페인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장본인이란 것을. 마치 그 애를 처음 만난 날, 제가 그녀에게 완전히 묶여버리게 된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전 그 애의 그림자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습니다. 이대로 그녀의 빛 뒤에 숨어서, 그 애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그맘때 쯤이었죠. 대형 기획사에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 게.
기획사의 요구는 냉혹하고도 현명했습니다. 밴드 ‘탄산과 카페인’을 회사로 데려오고 싶다. 다만 기타리스트는 빼고, 가수만 데려오고 싶다. 기타리스트는 우리 회사에도 많으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메일을 열어본 건 저였습니다. 메일을 읽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커녕 오히려 맑아지더군요.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이.
그림자가 빛을 끝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 애는 점점 밝아져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저 같은 건 이제 그만 떨어져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되도 않는 핑계로 화를 냈습니다. 너 같은 거 따까리 해주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나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각자 갈 길 가자.
그리고 그 전화를 끝으로 저희의 연은 완전히 끊어졌죠. 아니 사실은, 제가 완전히 끊어버렸습니다. 다시는 그 애가 저를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어버렸으니까요.
머지 않아 그 애는 제의를 받은 기획사에 캐스팅이 되었고 제 예상처럼 점점 더 빛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오늘, 제가 사연을 보낸 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앉아있죠. 만약 이 사연이 뽑히게 된다면 지금 그 애가 이 글을 읽어주고 있겠네요. 그런 걸 노린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지은아. 가끔 그립긴 하지만, 그 시절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해. 그러니까 죄책감 같은 거 가질 생각 말고 앞으로도 너가 사랑하는 음악 원없이 해주라. 그래도 오늘만큼은, 딱 3분 동안만이라도 기억되고 싶다는 마음에 이기적인 신청곡 하나 보내보려고.
이 사연이 읽히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보고 계신다면 탄산과 카페인의 ‘커피와 사이다’를 신청합니다. 정직한 작명을 보시면 알겠지만, 저희 첫 자작곡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