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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네랑 Jan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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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으로의 이민 그리고 첫 직장

2007년 11월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제주도에서 대학을 나오고 L 사 대기업을 Mobile Embeded software engineer로써 취업하던 날 나의 부모님은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다. 당시 지방대에서 여자가(?) 공대를 다니고 졸업 전에 취업을 했다는 그 스토리가 뭔가 엄청난 걸 이뤄낸 듯한 자랑거리가 되었고, 부모님 역시 일하느라 바쁘셔서 도와준 것도 없는데 알아서 취업했다며 겸손하지만 겸손하지 않은 딸 자랑을 하며 뿌듯해하셨다.


 당시 3G 모바일이 시작될 즈음, 1년 중 6개월 이상의 시간을 영국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 해외 장기 출장을 다녔고 그렇게 잘 다니다가 2007년의 어느 날 결혼과 동시에 이민을 통보받은 나의 부모님은 굉장히 충격을 받으셨을 것이다.  

이미 영국 *HSMP (현 Tier1) Visa를 신청해 놓고 통보를 받으셨으니 부모님 입장에서  엄청난 배신감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하지만 그 당시엔 내 안에 나로 가득 차 있던 시기라 부모님의 충격까지 세심하게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내 생각에) 영국에 이민을 가는 것 자체는 부모님에게 그렇게 충격은 아니었던 거 같다. 이미 미국과 일본에 고모들이 살고 계셨고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기에, 본인 딸 성격상 왠지 본인 딸도 한국에서 살 것 같진 않다 생각하셨으리라.  

그분들에게 그 보다 더 충격은 아마도 자랑스러웠고 자랑거리였던 대기업을 그만둔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퇴직하는 부분에 대해서 유독 여러 번 만류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분들의 딸인 나는 의지가 확고했고 잠깐의 반대가 있었지만 나의 계획대로 결혼을 하고, 7월에 마지막 출장으로 영국으로 나와 정착할 터를 알아보았으며 11월에 퇴사를 하여 영국에 정착하게 다.  

지금은 많이 내려놓은 *J 형 인간이지만 그 당시엔 트리플 J였던 때라 모든 게 계획되어 있고 그에 따라 살아야 직성에 풀러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꽤나 피곤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이듬해 1월 나는 ST Ericsson (구 Ericsson)에 Integration Engineer로 바로 취업을 할 수 있었고, 영어는 부족했지만 자신감 충만했던 나는 웃돈 붙여 연봉협상을 하며 취업하였고 추 후 *Provation 기간이 끝나자마자 원하던 부서( Customer Support Software Engineer )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언젠가 나를 인터뷰해 줬던 분이 말씀하시길 내가 옮길 거라로 생각했더란다. 하고자 하는 게 뚜렷해 보였다 했고, 그래서 연봉을 더 올려서 계약한 거였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찼고 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만 해도 외향적인 성향이었어서 부족한 영어실력을 화통함과 밝음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던 때였고, 개인적이고 똑똑한 사람보다 경력과 인성을 더 중시하는 영국 회사들의 인사 덕목에 더 잘 맞았었던 거 같다.  


 사회 초 년생으로 자신감 넘쳤던 나는 ST Ericsson을 다니면서 인생 첫 좌절을 느꼈다. 나의 영어는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부족했고 나의 지식은 지극히 Application Software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Hardware system에 더 focus 된 회사를 다니며 몇 번을 들어도 감이 오지 않는 그 Hardware 세계에서 나의 brain이 멈춰버린 것 같았고 난 그걸 들킬까 항상 긴장하며 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게 한국회사만큼 바쁘지도 않았고 일거리가 많지도 않은 업무 환경에서 일이 없으면 좋아야 하는데...

 바쁘게 일하며 잘난 맛으로 사회초년생을 보냈던 콧대 높던 나는 널널한 업무량에 되려 멘붕이 왔고 회사 안에서 나의 가치에 대한 의심에 빠지는 딜레마의 연속이었다.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외향적이던 나의 성향은 점점 내향적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갈수록 언어의 장벽은 더욱 높아졌다. 그들은 나를 위해 말을 천천히 하거나 또박또박해주지 않았다. 미팅을 들어가면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의 대화들이 오고 갔고, 자리로 돌아오면 내 사수에게 이메일로 미팅동안 나누었던 내용이 이런저런 내용이 맞냐며 눈치 백 단의 스킬을 발휘해 글로써 재차 확인받아야 했다. 

특히 다국적 사람들이 모인 이 유럽에 영어 발음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의 영어까지 캐치하기엔 나의 영어실력은 턱 없이 부족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엔지니어 특성상 대부분의 업무가 이메일로 진행되었고 커피 브레이크 타임 없이 점심도 자리에서 샌드위치로 때우며 그렇게 3년 넘는 시간이 지났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도 혼밥을 즐기던 편이었던지라 그때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그 시간들이 왠지 씁쓸하고 외로웠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좋은 직장 동료가 있었고 집 초대도 받으며 관계형성이 있었지만 초집중을 하며 영어라는 언어로 관계를 이어가야 되는 상황들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정시 퇴근을 하며 널널한 일상에 심지에 한국으로 출장 갈 기회도 있었고 표면적으로는 꽤 괜찮은 삶이었지만, 나는 어느새 한껏 쪼그라들어있었고, 바보가 된 것 같았고, 나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나의 힘듦은 그에겐 투정이었고, 그의 힘듦은 나에겐 부러움이었다.


 나도 힘들었지만 영국에서 한국 회사를 다니던 신랑은 나와 정 반대의 이유로, (그 당시) 한국 회사 특유의 과도한 업무덕에 열정적(?)으로 일하며 힘들어할 때 였어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심적 여유가 없었다. 

반복되는 대화에 어느 순간 나는 그의 힘듦을 짊어지고 싶지도 않았고, 나의 힘듦을 그에게 나누고 싶지도 않아 졌다.  그저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갈 뿐...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감 넘쳤던 내가 나의 한계를 인정하기까지 버티며 지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막연히 회사를 옮겨야겠다 생각하며 다른 회사들을 알아봤다. 

영어로 스트레스가 많았던 터라 외국(?) 회사를 가고 싶진 않았고, 그렇다고 나에게 결핵과 위궤양이라는 병을 선물했던 한국회사를 가고 싶지도 않았었다. (당시 한국 직장문화가 지금에 비해 꽤 공격적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감사하게 비슷한 계열의 회사들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지만 쪼그라져있어서였을까 왜 인지 두려웠고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Turning Point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 했다.

고등학교 때 국어와 논술이 싫어 이과를 선택한 덕에 나의 진학 경로는 자연스레 이과 전공이 되었고 그래도 수학과 과학처럼 정답이 있는 게 좋았기에 코딩하고 실행하면 결과로 보이던 게 깔끔해서 computer science 과를 가게 되었고, 그렇게 관련계열의 직장에 이력서를 넣었고 그렇게 달려왔다. 


하지만 당시에 난 좌절했고 무너졌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고 내가 정말 잘하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지, 이게 정말 맞는 길인지 확인해야 했다. 뭔가 전혀 색 다른 일을 하고 싶었고 무너진 나를 찾고 싶었다...



*HSMP ( High Skilled Migration Permit)  : IT 쪽이나 고급(High Skilled) 기술을 포인트화 하여 기준 point가 넘으면 신청할 수 있는 비자였는데 몇 년 후 없어지고, Tire-1으로 바뀜.

영국은 비자를 통비자로 주기보단 중간에 한번 renewal 하게끔 많이 주는데 ( 신청비가 꽤 비싸서 그걸로 나라생계를 유지하나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도 한다. --;) 새 비자가 생겼다가 몇 년 후 없어지기도 하고 갱신 조건이 2~3년에 한 번씩 바뀌기거나 신청 가격도 매번 오르니 어떤 비자로 영국을 오든 갱신하기 6개월~1년 전부터 해당비자조건등을 수시로 체크하는 게 좋음.

*MBTI - J : 계획형

*Provation 기간 : 회사마다 그 기간은 다를 수 있는데 정규직으로 취업 후 몇 주 혹은 몇 달 (업종에 따라 다르며 IT 쪽은 1~3개월이 보통이지만 6개월까지 보는 회사도 있음) 동안 사회성이나 업무처리 능력등을 보는 기간으로 크게 성과가 없더라도 팀원으로써 문제가 없으면 보통은 잘 넘기는 기간이지만 회사 사정상 혹은 개인 역량상 부족하다 싶으면 회사차원에서 잘려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기간.


여담으로..

 우리에겐 '구리'라는 옐로 라보라도 리트리버 종의 애견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건조한 우리 삶에 한줄기 빛 같은 기쁨이 되어주었고, 그 아이덕에 주말마다 바깥바람 쐬며 우울감을 자제시켰던 것 같다.

아기 때 참 유연했던 구리 ㅎㅎ
구리는 자기가 작은 줄 아는지 항상 저렇게 몸 위에 올라와 앉곤 했다. ^^
사람을 좋아하고 웃는 게 너무 예뻤던 순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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