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시어머니가 내게 보여주는, 길어서 막막한 현실
시어머니의 아흔 번째 생신을 맞아 파리에 왔다.
어머님 여든 되시던 생신 때, 미쉘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친구분들까지 모시고 한 잔치를 마지막으로 다시 바깥에서 생신을 기념하긴 십 년 만이다. (모임, 파티를 그렇게도 좋아하셨던 분이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점점 더 생신상 받기를 싫어하신다.)
가족들이 한 테이블에 모였고, 레스토랑 안은 생각보다 크고 조용했다
어머니는 평생 교직에 계셨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하셨고, 그로부터 벌써 서른다섯 해가 지났다.
퇴직 후에는 고고 미술사를 공부해 보고 싶다고 하셨고,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 평생 교육관에 신청을 하셔서 수업을 받기 시작하셨었다.
하지만 그 무렵 시아버님(어머님의 남편)께서 편찮으셨고, 병원에서는 오래 못 사실 거라고 하셨었다.
그 사이 어머니의 시간은 미뤄졌다.
어머님은 아버님 간호를 위해 하시려던 공부를 접으시고 간병에만 전념하셨고 그때 아버님은 쌩쌩하게 다시 일어나셔서는 정상인과 다름없이 3년을 더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꽤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으셨다.
병원에서는 우울증이 심해지면 약을 늘리기도 하고, 괜찮아지시면 약을 줄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한 채로 7년 정도를 그렇게 마음의 감옥에서 지내셨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마음이 먼저 닫혀 있던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쉰다섯에 정년퇴직을 하셨다 -어머님 시절엔 여자의 정년퇴직은 55세였다-
지금 아흔이시니, 퇴직 이후의 시간이 서른다섯 해다.
서른다섯 해면, 다시 한번 직업 인생을 시작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느리게라도, 중간에 쉬어 가면서라도 스무 해, 스물다섯 해쯤은 충분히 무언가를 더 해볼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늘 ‘지금은 아닌 때’로 밀려났다.
잘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우아한 정적을 깨고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내 뇌리를 밤새도록 점령한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여든이 넘어가며 어머님은 자주 넘어지신다.
최근 10년간 몇 번의 골절을 겪으신 뒤, 허리가 눈에 띄게 굽으셨고, 걷는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지셨다.
시간이 먼저 끝난 게 아니라, 몸이 먼저 문을 닫아버린 것처럼 보인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조용히 닫힌다.
우리는 인생이 짧다고 말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길다는 가능성에는 거의 대비하지 않는다.
곧 끝날 것처럼 말하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아직 한참 남았다고 가정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선택은 미뤄지고,
어떤 관심은 접힌 채로 남고,
어떤 가능성은 ‘그럴 수도 있었던 일’로만 정리된다.
인생이 짧아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생각보다 길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상상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오래 살아남은 시간 앞에서
우리는 늘 같은 질문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까지 이 상태로 살아도 괜찮은지,
이 정도의 나로 몇십 년을 더 버틸 수 있는지.
인생이 길다는 건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도망친 채로 오래 살아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도망칠 수 없는 시간들을 바라보며...
From Paris ~
멈춰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는 뜻으로.〈Still, the Train Arrives〉 —‘여전히, 기차는 들어온다’로 지어봤다.
이 곡은 멈춰 선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젊음과 노년이 같은 플랫폼에 서 있어도 기차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도착한다.
슬픔은 과장되지 않고, 시간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갈 뿐이라는 사실을, 이 단아하고 슬픈 왈츠가 남긴다.
무언가를 잃었다기보다, 이미 지나와버린 시간을 바라보는 느낌에 가까운 곡.
https://youtu.be/tiBayHqA35U?si=JtJoP3jQ3gSjWCy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