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좋은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수 Feb 11. 2016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나이 사십에 문단에 등단하여 100여 편이 넘는 장, 단편소설을 썼다는, 10만 고정 독자를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그녀는

 "마흔 살까지 보통 여자로 산 체험을 파먹었다"라고 겸손히 말했다.

 

 나는 궁금했다. 지금 내 나이가 그녀가 등단한 그 나이이고 나를 감히 그녀와 비교하자는 건 아니지만, 어떤 분이셨을지, 어떤 배경으로 글을 쓰게 되신 건지, 그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녀는 일제 치하에 태어나 해방과 6.25 동란을 치르고, 휴전과 4.19 혁명, 5.16을 거쳐 근대화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격동기를 거쳐왔다. 일찍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하나뿐인 오빠도 잃었다.

 

 "그걸 일종의 의식화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뭐든지 챙겨서 보게 되고 무심히 사는 것이 없어지니까, 바로 그것이 사는 맛의 심화이지만 고단한 일이기도 해요. 이건 좀 신기한 일인데 문학은 지독한 곤란에 빠졌을 때 구원의 여지가 되기도 하지요. 곤란을 곧 문학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전쟁통에도 언젠가 소설로 되살려내 오늘의 수모를 갚아주리라고 생각하면서 자존심을 회복하기도 했었으니까요."


"... 6.25가 없었어도 내가 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때 스무 살 스물한 살 무렵에 힘든 시기를 겪고 남다른 경험을 하고 하면서 내가 이걸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언젠가는 내가 이걸 쓰리라 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 생각이 그 고통스러운 시절을 견디게 하는 힘과 위로가 되어준 것 같아요.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렸다가 그러면서 부대낄 때 얼마나 이상할 일을 다 겪었겠어요... 언제나 위로가 됐던 건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이었죠.."

 

 

 그녀와 많이 닮았다는 그녀의 어머니는 하나뿐인 딸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울로 데리고 와 교육을 시키셨고,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하필 입학이 1950년 6월이라 며칠을 채 다니지는 못했다고 한다.

 23살 나이에 어쩌면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결혼을 한다. 10년간 오 남매를 낳아 기르며 대가족의 며느리이자 어머니, 부인으로 살다 막내가 7살이 되던 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 아닌 채로 살았던 세월이 길었던 게 좋았어요. 밑천이 많게 되었거든요. 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쓸 거리가 없다는 느낌은 거의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너무 일찍 전업작가가 되는 게 위태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젊은 세대는 문학의 세례를 우리와는 전혀 다른 데서 받은 것 같아요. 나 같은 경우에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산 시간들이 먼저 있었잖아요. 그걸 주부로서의 삶이라고 친다면, 그냥 주부로서의 삶에 성실했다고 할까, 그러면서 이웃들도 사귀고, 이런 기간이 꽤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모르지만 그런 시간들이 나중에 보면 다 문학수업이기도 합니다. 꼭 전쟁 같은 극한의 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박노갑 선생님께서 그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요. 포도주가 만들어지려면 뭐가 필요하냐. 우리는 포도, 소주, 설탕 뭐 이런  대답을 내놓았는데 선생님의 대답은 '시간'이었어요. 이 질문은 아직도 잊히질 않고 있습니다.

 

 밖으로 분출되지 않으면 안 될 때, 그때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젊은 작가들, 다들 재주들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나는 글을 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는 일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체험과 상상력이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고 상상력만 과잉되어 있는 작품들은 읽고 나면 좀 허망해요."

 

 

 전쟁을 겪고 그 회오리 안에서 그 회오리가 그녀를 조금도 비껴가지 않았을 때 겪은 이러저러한 특별한 경험에 대해 증언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냥 잊어도 될 것을, 꼭 써야만 했던 기질.

 

 

 중학교 2학년 때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어 책을 읽었다고 한다. 해방되고 난 뒤에도 번역본이 잘 읽히지가 않아 주로 일어판을 주로 봤다고 하는데 그 당시 바로 한글로 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먼 훗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도 재미나게 읽으셨다는 작가의 또 다른 말.

 ".. 제가 일본 사소설에서 배운 게 있다면, 일종의 의식의 흐름 같은 걸 겁니다. 기발한 줄거리보다도, 잠재의식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전의 소설에서는 맛보지 못한, 운명 같은 거창한 게 아닌, 작은 심리의 움직임 말이에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당부하는 말씀.

 "새로운 소설을 쓰는 것도 명작을 거쳐서 새로운 소설을 쓴다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전혀 그런 과정을 안 거치고 말재주만 가지고 쓴다면 문제죠. 예전에는 아주 어려운 소설도 안 읽으면 남들이 말하는데 끼어들지도 못하고 하니까 읽었어요. 그렇게 읽은 소설은 그때 받은 충격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읽어도 좋고 글을 보는 안목도 생기죠. 그런 거대한 산맥을 거치고 나면 자기 작품에 대해 겸손해져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굉장한 것으로 아는 사람, 자기 것만 제일로 아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정말 위대한 것에서 받은 충격이 없으니까 그러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도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 같아요."

 

 

 그녀의 소설은 그녀에게 이런 의미와 의도도 있다.

 "가령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같은 소설에서는 체험을 비틀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람의 운명보다는 그 시대의 풍속, 그러니까 1930-1950년대 시골과 서울의 모든 풍속을 재현하고 싶었죠. 소설로서는 가치가 사라지더라도 나중에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으면 했습니다.."

 

 

 

 그녀의 성격을 드러내는 인터뷰 내용도 있다.

 "어쩌면 내 삶에 뚜렷하게 일괄돼 온 것은 어떤 개인주의적 성향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단체에 생리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내 의식의 밑바닥에 깔린 정치 허무주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작가회의 이념에 반대한다거나 그 일원인 것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뭔지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은 불편하다. 1970년대 아주 암울했던 시대에는 내가 직접 찾아가서 자유실천 문인 협의회의 회원이 됐었다. 그때는 자신이 일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긍지가 됐던 시절이었다."

 

 

 그 밖의 흥미로웠던 인터뷰 내용.

 (신비로움에 대한 동경과 이성)

 신비스러움에 대한 동경, 가령 굿 구경을 좋아한다든가 굿의 작두 타기 같은 것에 굉장한 흥미를 갖는 반면 굿을 하는 주인을 딱하게 생각하는, 말하자면 이성을 중시하는 측면이 늘 선생님의 이번 소설이나 다른 에세이, 칼럼 등에서 보입니다. 그런 신비성과 이성의 팽팽한 대립 같은 게 선생님 문학에서 큰 부분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이북이라 가볼 수 없지만 개성 근방에 덕물산이라고 있어요. 그곳이 우리나라 무속의 메카 같은 뎁니다. 그곳이 우리 고향이랑 아주 가까워요. 전번에 이 소설 때문에 전방에 가볼 일이 있어 일부러 가봤더니 덕물산이 보이더군요. 최영 장군 사당이며 억울하게 죽은 큰 인물들의 신을 모셔놓았는데 어렸을 때 보면 그 산에서 팔도 무당들이 다 모여 무슨 굿인가 크게 벌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 굿이 내게 큰 인상으로 자리 잡고 있지요. 그렇지만 또 푸닥거리라든가 하는 것은 아주 싫어했어요. 이번에 구약을 읽으면서도 우리나라의 무속과 비슷한 측면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무속신앙이 신앙이 되지 못한 것은 너무 사사로운 것에 빠진 탓이 아닌가 싶어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예언자들을 보면 모두 개인을 위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공동선과 민족을 위한 사람들이었거든요. 늘 도덕의 편에 서 있고 말이죠. 한데 우리에게 무속은 일종의 사적인 문제를 계략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치우쳐 있었단 얘기죠."

 

 

 

 

 

 70대가 된 그녀에게 던진 질문.

 칠십 대의 시간이 마음에 드십니까.

 

 "뜻하지 않은 나이죠. 예정에 없었던. 걱정도 없고 먼 계획도 없고 하루하루 편안히 가요. 예전에는 작가로서 계약도 하고 연재도 했지만 이제는 매이는 일은 안 하게 되더라고요. 이제 보면 여백의 삶이지만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경제적, 육체적, 감정적으로 내가 온전히 독립했다는 자유의 느낌이 굉장히 좋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