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느 하루.
날이 덥다.
더워도 너무 더워서 잠깐이라도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속옷까지 깡그리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땀에 젖어버린다.
딸아이가 방학이라 지난 방학처럼 나와 실컷 돌아다니며 같이 놀게 될 줄 알았지만. 이번 방학엔 왠지 시간이 없고 바쁘기만 하다.
아침엔 느긋이 일어나 평소보다 늦은 아침을 먹지만. 어쩌다 숙제를 덜했거나 해서 일찍 일어난 날엔 아침을 차려내라 호통을 친다.
나는 또 그제야 주섬주섬 일어나 아침을 대령하기도 하고.
이미 일어나 있는 상태였다가 다시 누워 빈둥거리는 중에 호통을 들으면 '나는 역시 아이를 키우는 건 적성에 안 맞아.. 나를 구속하고 조정하고 있어..' 구시렁댄다.
그래도 보통은 신랑이 먼저 나가니까 대부분 깨어있기는 하다.
신랑에겐 미숫가루를 우유에 타서 한잔 주기도 하고. 비타민과 홍삼을 챙겨준다.
어느 날엔 복숭아를 한 박스 사다가 깎아서. 쫓아다니며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가는 길엔 배웅도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제대로 타서 일회용 컵에 빨대까지 꼽아준다.
손수건도 챙기고. 핸드폰 챙겼는지 확인도 해주고. 저녁엔 일찍 오냐고 묻기도 한다.
근데 혹시 전날 싸웠거나.
내가 되게 늦게 잤거나.
이유 없이 기분이 우울하거나 하면.
이 서비스는 싹 없다.
그렇게 신랑이 가고 나면 그다음이 딸의 아침식사인데 매일매일 요구사항이 다르다.
어느 날은 감자사라다 넣은 샌드위치여야 하고.
어느 날엔 느닷없이 비빔밥이고.
양상추에 돼지 불고기였다가.
파 넣은 계란볶음밥이다.
그래도 나는 엄마니까 아이의 왕성한 식욕을 행복하게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요즘 들어 피둥피둥 살이 찌는 게 좀 걱정스럽긴 하지만 저렇게 매사 배가 고프고 맛있다는데. 인생 뭐 있나. 맛난 거 먹고 행복하다는데.
내 밥은 맛있다.
역시나 내 밥을 받은 딸은 한입 가득 밥을 물고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한껏 오버를 한다.
맛있어!!!
당연 맛있지. 내 밥인데.
엄마도 엄마 밥이 제일 맛있어.
넌 좀 행복한 거야.
아침을 먹고 딸은 10시쯤 나간다.
11시 반까지 방과 후를 듣고. 잠시 집에 와서 간식 드시고.
다시 12시쯤 영어특강을 갔다가 1시 반쯤 온다. 점심 드시고.
영어는 숙제가 없고 수학은 숙제가 많다. 그 숙제를 점심 먹고 2-4시 사이 주로 한다.
3시 반에서 4시 사이 학원을 간다. 영어나 수학.
그렇게 다녀오면 6시 10분. 바로 저녁시간.
나는 밥순이다.
아침. 간식. 점심. 간식. 저녁... 이걸 매일 반복하고 있고.
나는 이게 좋은 날도 있고 지겨운 날도 있는데.
딸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이 더운 날에 매일매일 꼬박꼬박 그 스케줄에 맞추어 학교랑 학원을 들락거리며 땀에 흠뻑 젖어 들어오면서도 재밌고 신나 보인다. 킥보드를 끌고 다녀오기도 하고. 이모가 선물 준 에코백도 맸다가. 중간중간 문방구에 들러 쇼핑도 한다. 가끔 혼자 아딸에 가서 떡볶이를 먹고 오기도 한다.
왕성한 식욕으로 탐스럽게 먹어대는 돼지 같은 내 새끼가 한없이 이쁘지만.
이 덥디더운 날씨에 불 켜고 밥을 해대자니 가끔 지치기도 해서 중간 한 끼씩은 나가 먹기도 하고. 대충 비벼주기도 하고 그랬다.
끼니 챙겨주고 간식 챙겨주는 게 좋은지 엄마의 외출을 통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한 번씩은 나가야지. 이렇게 집에만 있다가 내가 또 너무 다운이 되어버리면 이성을 잃고 짜증을 낼지도 몰라..
맘을 먹고 나갔다. 물론 따님께 허락을 받고. 종일 외출.
식사는 미리 준비. 컵라면.
10시에 나가는 딸과 함께 나가서 우선 영화를 한편.
평일이래도 방학기간이라 사람이 많을까 걱정했지만 내가 봤던 영화가 썩 흥행작이 아녔는지 다행히 텅텅 비어있었다.
보고 싶었던 영화라 잔뜩 기대하고 앉아있는데 내 옆자리 두 여자가 영화 시작 직전까지 끊임없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비어있는 다른 자리로 옮길까도 했지만 내가 원하는 좌석으로 선택해서 들어오기도 했고. 괜히 옮겼다가 영화 보는 중간에 옮기게 되는 사태도 귀찮아 버티고 있었는데.
아 이 여자분들.. 영화를 보는 중간에도 속닥속닥.
중요한 장면에서도 크게 감탄사.
나중엔 아예 영화 속 배우들과 대화를 하듯이 말을 해대서 매우 짜증이 나고 영화를 집중해서 보기가 힘들었다.
맘 같아서는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그런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하는 소심쟁이라 그네들의 옆얼굴도 힐끗거리질 못했다.
영화는 좋았는데.. 너무 좋았는데.
왜. 왜. 왜. 왜 대화를 하니. 대화를.
영화보기 직전에 서점 들러 책 두 권을 정성스레 골라뒀었다.
지난번 알바끝나고 흥분해서 마구 사재낀 책들을 보다 보니. 꽤 여러 권이 막상 잘 읽히지 않거나 실망스러운-이제 나 건방져졌는지 읽다 보면 훗. 쳇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게 만드는 책이 있다-것들이 있어서 신중하게 잘 보고 고르자고 맘을 먹었었다.
재미나게 읽힐 두 권의 책을 사고.
서점 앞에 옷가게에 한 장에 만원. 티가 있길래 그것도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만 원짜리 티 하나, 39900원짜리 상의 하나를 샀다.
나는 주로 '인생 뭐 있나..' 하는 맘이 생기면 옷을 사거나 혼자 맛있는 걸 먹는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온 김에 장을 봐서 들어가야지 하며 상가에 들렀는데 당이 훅. 떨어지는 허기를 만났다.
아침 조금 먹고 나온 뒤에 커피 한잔 사 먹고. 점심을 안 먹었구나... 시간이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상가 지하에 불친절하기로 소문난 콩나물국밥집이 하나 있는데 아이들을 생각해서인지 수제 돈가스도 같이 팔았다.
나는 콩나물국밥도 수제 돈가스도 썩 좋아하질 않지만 그걸 따질 때가 아니어서.
수제 돈가스 두 개를 시켜 하나는 지금 주시고요. 하나는 포장해주세요..
한창 바쁠 때가 지나 손님 자리에서 졸고 계시던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셨고.
그 불친절하신 중년의 깡마른 여자 사장님은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으셨다.
배도 고프고 당도 떨어져 정신 나간 여자처럼 허공을 쳐다보고 있자니.
"덥지 않아요, 그 자리? 점심때가 지나면 에어컨 끄거든요. 이 안쪽으로 와요. 이쪽이 더 시원해.."
아. 그런가요.. 나는 주섬주섬 장본 봉다리를 챙겨 자리를 옮겼다. 가계 안에 손님은 나뿐이었다.
식사가 나오고 나는 좋아하지 않는 돈가스를 부지런히 썰어 얼른 입에 가져다 넣었다.
깍두기도 맛있고 밥도 맛있고. 서비스 콩나물국도 맛있는데 이 돈가스 또 소화가 안될 텐데. 하면서도.
불친절한 사장님은 카운터에서 허공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는 역시나 소심해서 그분이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지 확인하진 못했다.
나름 돈가스를 무척 좋아하는 여자처럼 식사를 마치고 포장된 돈가스 꾸러미도 챙겨 나왔다.
내가 혼자 식사를 하는 내내 한마디도 걸어주지 않아 고마웠다.
아까 자리 옮기라는 말 외에.
혹시 내가 혼자 밥을 먹는다고 가여워 무슨 추임새라도 넣었으면 아까 그 극장의 여자들처럼 불편하고 짜증스러워 "그 식당 사장님은 정말 불친절하대~?" 하며 소문에 동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장님은 항상 무뚝뚝하고 표정이 없다.
인사도 안 한다.
예전에 우리 딸내미가 여기서 돈가스를 한입 베어 물고 "맛있어!! 완전 맛있어!!" 하며 우적거리는 모습을. 한없이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쳐다보던 사장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장님은 실은 맘이 따뜻하고 세심한 여자임에 틀림없는데 인사 안 하고 표정 없다고 불친절하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다.
나는 그게 편한데.
인사 안 하고 말 안 걸고 밥은 맛있는 집.
슈퍼에서 장본 봉다리, 책이 든 종이가방, 내 핸드백, 빵봉다리, 옷봉다리를 주렁주렁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역시나 날씨는 여전히 뜨겁고 습했다.
역시나 소화는 안되고 배는 부르고 땀으로 질척거렸지만 기분은 한결 산뜻했다.
영화는 재밌었고 옆에 앉은 여자들은 짜증스러웠지만.
콩나물국밥 사장님은 말을 걸지 않았고 밥은 맛있었다.
한 손엔 딸아이의 저녁거리인 돈가스. 한 손엔 이따 읽을 책 두권. 옷 두 벌.
그 뒤에 신랑 일찍 오면 만들 저녁거리. 딸 먹일 간식거리 빵.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