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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Mar 22. 2016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나로서는 조금 힘든 고백


"꼭 다 그렇다고 단정해 말할 수는 없지만, 우울증과 같이 심리적으로 아픈 '착한 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어렸을 때 부모님 등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일종의 패턴을 찾을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가부장적인 아버지나 성격이 강한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분이 유독 많은 것 같아요. 아니면 형제들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해 부모님께 원하는 것을 해드림으로써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컸을 수도 있고요.

 어떤 경우에는 부모님 서로의 관계가 좋지 않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나라도 말을 잘 들어 힘들어하는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려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던 분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 타인의 요구에 맞혀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의 욕망이나 감정에 소홀해진다는 점입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소외시키고 무시하니 어른이 돼서도 내가 정말로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대체 누구인지 잘 몰라요.

 더불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자신이 느끼는 분노와 억울한 감점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니 상대를 향했어야 할 정당한 분노가 내면에 갇혀 본인 스스로를 공격하게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화도 제대로 못 내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 멍청이일까?'하고 말이지요.."

 

 

 이 글을 읽고 손 번쩍 들고 서 있는 사람 여럿 있을 것이다. 나도 손 번쩍 들었다.

  저요. 저요. 제가 그랬습니다.

 나는 응팔의 덕선이처럼 끼인 자식이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적은 없고 평범해 보이는 가정이었으나 내 엄마는 자신만의 생각이 있고 그게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분이라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다.

 첫째는 첫딸이라. 막내는 귀한 아들이라 넘치는 관심 속에 있었지만.

 둘째 딸인 나는 '알아서 하는 아이'라는 핑계를 대며 방치되었었다.

 가끔씩 감정을 폭발시키던 엄마는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이유를 모른 채 두 손을 싹싹 비비던 내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난다.

 나는 뭘 잘못했는지 모른 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에 상처받아 어렵게 어린 시절을 고백하듯 드러내며 상처를 치유할 때 나는 감히 내 엄마의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어찌 됐든 자라나 성인이 되기 전에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일 수밖에 없다. 그걸 너머 그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건 한참이나 자라 어른이 되어서야 가능하니까.


 아버지라는 존재는 세상 중에서도 두 번째 존재이고 어머니라는 존재는 나와 하나였던 가장 근본적인 세상이라 생각된다.

 어머니와 단절된 채 자라난 아이는 세상에 쉽게 발을 내딛지 못한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아이는 세상에 나가서도 바들바들 떨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인정받기 위해 과한 노력을 한다. 그게 또 자존감을 해치고. 악순환이 한동안 계속된다.

 

 

 나는 내 엄마의 얘기를 꺼내 들기가 힘들었다.

 나와 상관없는. 나를 키운 적 없고. 나와 피가 섞이지 않은 시어머니는 얼마든지 비난하고 욕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정말이지 진저리 치게 이용당하고 혹독한 시간을 보낸 뒤 가능해졌다.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하는 시어머니에게조차도 인정받고 싶어 짧지 않은 시간을 그녀에게 복종했었다.

 아직 나 스스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기 전에, 너무 일찍 결혼을 한 탓이다.

 이제 시어머니는 내려놓고 지낸다.

 말로써 말이 통하지 않고, 그녀는 변하지 않으며 나는 끊임없이 상처받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관계. 아직은 그렇다.

 

 

 "할 수 있는 만큼 해주었는데도 상대의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반대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내가 어쩔 줄 몰라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할 만큼 다 했으면 놓으세요.

 정말로 필요하면 저쪽에서 내가 해준 것을 바탕으로

 본인이 알아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스님.

 저 말씀에 위로를 느낍니다.

 딱 저 마음으로 제가 시어머님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며 살지 않기로 마음먹고.

 제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하는

 행동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아이가 잘 했을 때만 칭찬해주지 마시고

 아이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주세요.

 커서 다른 사람의 사랑과 인정에 배고프지 않도록요."

 

 


 

 

 하지만. 내 엄마는 내 엄마이지 않은가.

 나를 품은 근원이며 나를 키우고 여전히 내 옆에 계시는 내 엄마. 친정엄마.

 우리는 참 궁합이 안 맞는 모녀 사이이기도 했고. 나는 고분고분한 딸도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을 하고 좀 떨어져 지낸 뒤로 사이가 편해졌다.

 아이를 낳고 친정 근처로 와 엄마께 아이를 부탁했었지만. 역시 우리 엄마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나는 또 엄마 눈치를 보고 쉽게 지쳐하는 엄마가 불편해서 입주 아주머니를 들이고 엄마에겐 가끔씩의 감시자 역할만을 부탁했다.

 

 옆에 산다는 이유로 자주 외식도 모시고 다니고, 친정에 갈 때는 양손에 그득 최상급 과일과 고기, 생선을 사들고 갔다.

 뭘 이렇게 자꾸 사 오냐 하시면 그게 내심 뿌듯하고 좋았었다.

 하루는 친정에 갔는데 결혼식에 입고 갈 마이가 없어서 백화점에 몇 번을 갔다가 그냥 왔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침 지갑에 모아둔 상품권이 여러 장 있어 탈탈 털어 엄마에게 내밀었다.

 제대로 된 거 하나 사서 장만해두시라고 내미는데. 엄마는 대뜸 매우 미안한 얼굴로.

 "어. 근데 이거 막내(내 남동생) 줘도 되겠니..?" 하셨다.

 엄마 드리는 거니까 맘대로 하시라고 하며 나오는데 그 일이 자꾸 맘에 남았다.

 나는 가슴이 썰렁해져 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위하는 자식은 항상 막내아들. 요즘은 그렇다.

 예전엔 언니한테 치여서 관심 밖이었는데. 언니가 재수 끝에 대학을 가고 얼마나 기쁘셨는지 재수를 하는 나를 두고 동네 아줌마들과 해외여행을 떠나셨던 분이다. TV도 이따만한 걸로 바꾸고, 출근하시는 아버지 챙겨드리라며 곰탕을 산처럼 끓여놓고 가셨었지.. 지금은 웃음이 나는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그게 또 그때는 그렇게 서러웠다. 왜 우리 엄마는 우리네 일반 어머니들처럼 내게 헌신적이거나 따뜻하지 않은 건가.. 하면서 말이다.

 

 

 

 내 인생은 내 인생, 니들 인생은 니들 인생이라며 나름 쿨한 엄마인척을 하셨지만.

 나는 그 상황을 다 이해하지도 못했고, 나는 그저 자식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저쪽에 대한 애정과 나에 대한 애정이 다르게 느껴지면 상처받았다.

 이 나이가 되어 그나마 조금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시절 엄마도 어렸다는 사실. 삼 남매를 혼자 키워내며 어느 날은 너무 지쳤을 테고, 어느 날은 어린 날의 상처를 끄집어내며 우울해지기도 했었을 거라는 사실 정도이다.

 엄마의 아버지인 내 외할아버는 폭군이셨다고 한다. 영화배우처럼 훤칠하니 잘 생기셨던 젊은 날의 할아버지는 못하는 게 없는 재주꾼이었지만, 오로지 돈 버는 재주가 없으셨고 여자들에 인기가 많으셨다고 한다.

 세상의 어느 자식이 어릴 적 부모에게 아무 상처 없이 매끈하게만 자라날 수 있겠는가.

 엄마 시절의 또 어린 시절은 지금보다 폭력적인 시대였고, 그 시대 안에서 또 가난이라는 폭력이 있었을 테고, 무지한 부모의 무지한 폭력이 존재했을 것이다.

 

 

 

 사실 엄마의 얘기를 다 털어내 말하지 못하겠다. 그건 아직 술술 내뱉어질 만큼 쿨해지지 못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장애를 슬그머니 꺼내 놓자니 아직 마음이 따끔거린다.

 나는 솔직히 다른 딸들이 엄마 생각만 해도 눈물이 줄줄 흐른다는 애틋함에 공감하지 못한다.

 내 엄마는 좀 직설적이며 어느 때는 괴팍하며 이제와 보면 좀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를 생산해내시는 분이었다.

 지금도 좀 그러하고.

 내가 결혼하고 전화를 할 때마다. "계모"라고 부르면.

 -내가 내 성질에 내 새끼 키우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다리 밑에서 너를 주워다 키웠겠냐. 하신다.

 맞는 말이다. 그럴리는 없겠으니 나는 친 딸은 맞다.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바쁘셨지만 내겐 더없이 좋은 아빠였다.

 일찍 퇴근하시는 날엔 내 손을 잡고 동네 산책을 나가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빠 손을 이끌고 동네 문방구에 가서 눈독 들였던 물건들을 사 오곤 했다. 내가 사달라고 했던 건 군말 없이 사주 셨었다.

 비싼 일본제 핀부터 키티가 그려진 핸드백, 롤러스케이트, 하모니카,.. 중학교 때는 기타도 사주시며 학원도 보내주셨다.

 나는 그나마 아버지와의 끈끈한 유대감과 애정으로 비뚤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나를 아껴준 때

 세상도 나를 귀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세요.

 사랑하면 그 사람 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싶듯

 오늘도 사랑하는 '나'하고만 한번 시간을 보내주세요.

 맛있는 것도 사주고, 좋은 영화도 보여주고,

 경치 좋은 곳으로 데려도 가주고 해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들이듯 나에게도 공들여보세요."

 

 나는 이제야 이 나이가 되어서야 저 말을 이해하게 되었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내며 내 행복에 집중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내 분신 같은 딸을 챙기고, 내 딸은 절대 나와 같은 상처나 우울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

내 어릴 적 엄마가 내질렀던 알 수 없는 짜증을, 그 알 수 없는 억울한 상황을 재현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쓴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게 학습된 폭력이, 어딘가에서 갑자기 튀어나올까 겁이 나기 때문이다.



 

 나와 내 딸과 내 신랑이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 지금 내 삶의 전부다.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것.

 깨끗한 집에서 맛있고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편안하게 자는 것.

 

 

 

 

"사람들에게는 남들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마음속의 짐이 하나씩은 있습니다.

 가족사의 아픔, 숨어 있는 열등감, 밝힐 수 없는 병이나

 관계에서의 상처, 피할 수 없는 책임 중

 하나쯤은 다들 안고 사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짐의 무게 덕분에 경거망동하지 않고 겸손하며

 남을 이해하고 곱으로 더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그냥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절대로 다가 아니에요."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예전부터 들어서 이미 알았지만 크게 와 닿지 않았던 것을

 새로운 기회를 통해 깊이 체득화한다는 의미 같아요.

 우리는 몰라서 못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아는데 아직 내 경험화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크게 깨닫는 날, 왜 그렇게 성인들이 말씀하셨는지

 다 일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힘 있고 가진 자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는 법은

 내가 내 삶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바라는 것이 상대에게 없으면

 그 누구를 만나도 당당할 수 있어요.

 바라는 것이나 욕심이 있을 때 비굴해집니다."

 

 

 "스스로를 감동시킬 만큼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었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정말로 최선을 다했는지.

 그러면 눈물이 난다. 나도 모르게....."

 

 

 

 좋은 말씀이 많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필사를 하시는 분은 책 전체를 받아 적게 될지도 모르겠다.

 힘드실 때 읽어보시면 좀 위로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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