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외출
2박 3일 수련회에 가는 딸아이에게 아무 죄책감 없이 라면을 따끈하게 끓여주었다.
마침 비도 오고. 평소에 아침을 잘 먹지 않고 학교에 가는 딸아이지만, 오늘은 버스 타러 모이는 시간이 10시 반이고 해서 좀 출출할 것 같았다. 먼 길 떠나서 며칠이나 엄마랑 떨어져 있을 딸에게 보여준 엄마의 작은 모성애. 맛있는 음식이니 괜찮아. 딸은 어이없어 했지만.
평소와 같이 세탁기를 돌려 어제 새로 사온 홍학 무늬가 은은하게 박혀있는 이불보를 빨아두고.
끈적끈적한 바닥에 청소기를 윙 돌렸다. 그제와 어제, 연달아 딸아이의 친구들이 여럿 놀러 왔었다. 그제는 학교에 외부 행사가 있어 일찍 끝났는데 이 날을 벼르며 딸아이는 친구들이 놀러 온다고 내게 언질을 해두었었다. 여전히 학원에 다니지 않는 딸아이와 학원 다니는 친구들이 서로 시간을 맞춰 놀 시간이 별로 없던 터였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 딸아이가 혹시 주눅이라도 들까 걱정이 됐던 나는 손님 준비를 충실히 해두었다. 딸아이 방도 깨끗하게 정리를 해두고 화장실도 뽀송하게 청소했다. 실한 과일도 깎아 랩을 씌워 준비했다.
외부 행사에 사복 차림으로 갔던 아이들이 우르르 집에 몰려들었다.
나보다 키가 커진 딸보다 친구들은 키가 더 컸다. 옆으로 핸드백을 찬 아이, 짧은 청치마를 입은 아이, 빨갛게 틴트를 바른 아이들은 수줍음 없이 씩씩했다.
약속대로 치킨을 시켜두고 나가는데 자기들끼리 엽기 떡볶이를 추가로 시켜 먹겠다길래 돈도 두고 나왔다.
어저께는 또 근로자의 날이라 수업 2시간을 마치면 끝난다며 그저께 온 그 친구들이 또 오기로 했다고 했다. 이번엔 우리 집에 모여 마들렌을 만들기로 했다길래 재료와 도구들을 챙겨두고 자빠져 자고 있던 신랑까지 챙겨 밖으로 기어 나왔다.
전날 술에 얼큰하게 취해 늦게 들어온 신랑은 잠이 절실했겠지만 딸아이 친구들 앞에서 비실비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가는 그 뒷감당을 하기가 두려워 군말 없이 뒤따라 나왔다.
신랑 좋아하는 순두부집에 가서 맛나게 한 그릇씩을 비우고. 다시 근처에 새로 생겼다는 대형 쇼핑몰에 가서 커피 한잔 사 들고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미끼 상품이 있는 매대에 가서 기웃거렸지만 건질만한 게 보이질 않아 2층 가서 가방 구경도 하고. 질리면 잠깐 나왔다가 다시 팥빙수도 한 그릇 사 먹고. 다시 떡볶이에 튀김까지 먹도록 딸아이는 연락이 없었다.
도대체 신랑은 언제 집에 갈수 있는 거냐며 내게 연락을 해보라고 재촉해댔고.
신랑 얼굴이 흙빛이 되어 눈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친구들이 다 집에 갔다는 연락이 왔다.
연달아 이틀 아이의 친구들이 다녀간 집은 어수선하고 어질러져 있었다. 여기저기 떨어진 쿠키 쪼가리며 서걱서걱 먼지가 눈에 거슬리던 차에 청소기를 윙 돌리니 속이 후련했다.
빨래를 한바탕 돌리고 다시 돌리려고 했다가 빗줄기가 거세지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를 뒤져보니 감자 두 알이 보이길래 깍둑썰기를 해서 기름에 달달 볶다 간장과 설탕만 넣고 조려 내 밥을 먹었다. 뜨끈한 밥에 버터를 넣고 짭짤한 감자, 김, 단백질 보충을 위해 참치 캔 작은 걸 하나 까서 다 먹었다. 오랜만에 포만감이 들며 기운이 났다.
이 책 뒤적, 저 책 뒤적거리다 다 읽은 책들을 한 쪽에 쌓아두고. 아직 읽지 않은 책 중에 골라보려니 딱히 손이 가는 책이 없었다. 비도 오고 울적한 날엔 달게 읽히는 책이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늦게 자는 버릇 중에 있는 터라 정신이 멍해지는 찰나 낮잠을 잠깐 자고. 씻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신랑은 늦고. 아이도 없고. 아무 할 일도 없는 나는 문득 아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뺨을 비벼대며 내 새끼~하면 착 달라붙어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딸아이에게서 나는 시큰한 땀 냄새나 달달한 살 냄새가 그리웠다. 이놈 자식. 수련회 가서 신나있겠지. 어제도 늦게까지 가방 싸는 걸 도와 달라며 이 옷 넣었다 저 옷 뺐다를 무한 반복했더랬다.
평소에는 딸아이 때문에 늦게 집을 나서는 일이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저녁에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영화라도 한편 봐야지 신나서 가봤더니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다. 혼자 기계 앞에 서서 영화를 고르고 있으니 어떤 여자분이 와서 표를 내밀었다. 오기로 한 일행이 오지 않아 표 한 장이 남는다며 보겠냐고 했는데, 그 표를 받아들면 그 여자분 옆에 앉아 어색하게 보게 될 것 같아 정중히 거절을 했다.
다시 서점으로 가서 책을 한 권 뽑아들어 읽었다. 표지와 달리 내용이 마음에 와닿아 재미나게 읽혔다. 가벼운 주제는 아니었는데 나름 생각하고 있는 바와 비슷한 내용이 있어 꽤 읽어내려가던 책을 챙겨들고 계산을 했다. 달게 읽힐만한 책을 두 권정도 더 골라 같이 계산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 책을 꽤 샀는데. 그건 내가 아마 우울했다는 뜻일 게다.
언제부턴가 사 온 책들의 제목과 작가명을 다이어리에 적어두는데. 금방 읽고 팔아버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뭔가 아쉬운 맘이 들어 그랬나 보다. 이번 달 책을 20권 샀다. 대부분 다 읽었고. 이미 팔았다.
우울할 땐 책이지. 책이야.를 외치며 나오는데 배가 출출했다. 이미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 있었는데 식사를 할 수 있는 층은 11시까지 운영을 한다길래 올라가 보았다. 훅 땡기는 맥주.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마실 줄도 모르는 내가 아주 가끔 맥주 한 잔 정도가 당길 때가 있는데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나 보다. 국물떡볶이를 파는 집에 바삭한 튀김을 팔고. 생맥주를 같이 파는 집이 있었다. 떡볶이와 새우튀김, 맥주를 시켜 혼자 상을 받았는데 너무 신나는 느낌.
아. 쭉- 넘어가는 맥주.
한 잔이 다 비워지기도 전에 얼굴이 달아오르지만 그럭저럭 기분이 좋다. 새빨게지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와 보니 여전히 비가 오고. 날은 으슬으슬 추워져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이제 막 직장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인 듯 정장 차림이나 바바리에 구두를 신은 여자들이 많았다. 둘씩 모여 있는 여자들은 그들의 직장 얘기를 하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었다. 피곤하고 힘들겠지. 젊어서 힘들고. 어려서도 힘들고. 여자라서도 힘들고. 결혼해서도 힘들고. 아이 엄마라도 힘들다. 그래 힘들겠지. 나도 안다.
얼마 전에 딸아이에게 사준 약간 도톰한 잠바를 훔쳐 입고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날씨가 차고 버스가 더디게 왔지만 따뜻하게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주룩주룩 비가 오는 걸 맞고 있는 것도 기분이 썩 괜찮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비 오는 날 걸어 다니는 걸 좋아했다.
늦은 저녁 집에 들어왔지만 신랑은 여전히 아직이고.
아무도 없는 집이 쓸쓸했다.
딸아이 방에 들어가 불을 환하게 키고 한동안 서성였다.
낮에 이마트에서 인터넷으로 장을 보았는데 딸아이 속옷이랑, 딸아이 음료수, 딸이 좋아하는 간식거리, 생리대, 양말을 주문했더랬다. 내일 도착하면 차곡차곡 정리해서 아이 방에 넣어둬야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날씨 추워진다고 그리 말했는데 짧은 반바지만 챙겨갔다. 말 안 들으니 사춘기겠지. 추우면 엄마 생각나려나.
새벽이 되어 들어온 신랑은 아까 보내온 사진은 어디서 찍은 거냐 묻는다.
맥주 한 잔 혼술하고 얼굴 빨개진 날 보며 허허 웃는다. 특이해, 특이해. 내 마누라는 특이해.
집에 오면 항상 딸아이를 찾는 신랑도 허전한 눈치다.
오늘 지나고. 내일 지나고. 모레가 되면 아이가 돌아온다.
좋은 추억 많이 쌓고 재미나게 지내다가 오렴.
엄마는 내일도 늦게까지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