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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Apr 03. 2016

어느 평범한 주말 오후 ​

8번의 이사 후 어느 봄날


 근처에 사는 언니네로 향했다.

 딸아이와 조카를 놀게 해주려고 자주 만나러 간다. 조카는 딸보다 두 살 아래 남자아이인데 둘은 무척 다른 성격인데 불구하고 만날 때마다 너무 신나 한다.

 

 언니는 형부와 일이 있어 멀리 가는 중이라 했고.

 조카를 불러서 동네 상가에서 밥을 먹었다.

 언니는 미리 카톡으로.

 조카는 이미 점심을 먹은 상태이니 혹시 안 먹은 척 해도 먹은 거 다 안다고 말하라는데. 안 먹을 리가 있나.

 먹성 좋은 두 녀석은 왕돈가스를 시원하게 먹어치우고. 옆에 있는 카페에서 자몽에이드까지 주문해 빨대를 꼽아 나란히 쭉쭉 빨아댄다.

 

 좀 두껍게 입고 나온 딸아이가 더워하길래 상가에 있는 옷가게에 가서 반팔티를 사 입혔다.

 옷가게 사장님이 조카에게도 '송중기티'라며 군복 무늬 티셔츠를 권하셨다.

 더워?

 조카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시큰둥했는데. 혼잣말로 "사이즈가 안 맞을지도.."한다.

 입어볼래? 사이즈는 있다시는데.

 여전히 시큰둥. 적극적으로 입겠다는 의지도 없다.

 사장님이 거드신다.

 아이.. 원래 아드님들은 그런 의사표현 없잖아요~~

 아. 그런가. 아들이 없어서 몰랐네요. 딸아이는 뭐든 사준다면 간드러지게 애교를 부리는데.

 여전히 별 반응이 없어 몇 번을 묻다 마침 입고 있는 티도 시원해 보이길래 그냥 두고 나왔다.

 

 

 두 녀석을 놀이터로 먼저 보낸 뒤 나는 상가에 좀 더 남아 구경을 했다.

 이것저것 화사한 옷들과 싱싱한 과일들, 잡지에서나 볼 듯한 멋들어진 꽃가게, 커피점 등.. 눈 구경만 실컷 하다 나오는데. 맘에 걸린다.

 

 

 아. 저 녀석. 혹시 상처받은 거 아닐까.

 혼잣말로 사이즈 걱정을 했었는데.

 이모가 자기 친딸은 티를 사주고, 자기는 사줄 것처럼 굴더니 가격표보고 그냥 뒀다고 생각하며 빈정이 상했으면 어쩌지.

 다시 옷가게로 가서 '송중기티'를 사 왔다. 사장님 사이즈는 큰 걸로 주세요.

 아. 알죠. 이거면 맞을 거예요.

 

 

 티셔츠를 사서 놀이터로 찾아갔더니 두 녀석이 신나게 뛰놀고 있다.

 딸아이는 반팔티를 입고도 땀이 맺혀 있고. 조카 녀석은 긴팔이다.

 이야~.. 이모가 송중기티 사 왔다. 입자!!

 반응이 시큰둥하다. 글쎄. 좋아했던 걸까. 수줍었나.

 근데 밖에서 갈아입는 게 영 쑥스러웠는지 계속 망설이길래 입은 옷 위로 반팔티를 입히고 속에 입은 긴 티를 양 팔 빼고 위로 꺼내 줬다.

 조카는 씨익 웃는 척을 하다가.

 어. 좀 추운데. 한다.

 어? 추우면 안 되는데.

 아녜요. 됐어요. 놀면 더워요. 한다.

 녀석. 서운했던 거는 아니었나. 어찌 됐든 이모 맘이 한결 좋다.

 근데. 너 송중기.. 는 아니고. 진구로 하자. 까무잡잡하니 진구가 어울리네.

 

 

 

 봄이로구나. 하얗게 흐드러진 꽃나무들이 황홀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저기 벤치에는 반모임하는 엄마들도 모여있고.

 나는 좀 멀찍이 떨어져 잔디 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는데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에 입이 벌어졌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자니 금방 좀 서늘해져서 가지고 온 잠바에 스카프까지 둘러야 했지만. 봄바람이다. 이건.

 오래된 아파트 단지 안에 온통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다른 색 꽃은 일체 보이질 않고 온통 하얀 꽃들.

 고개를 들어 보니 아파트 건물이 따뜻한 햇볕 속에 서 있다. 겹쳐 있는 아파트 사이로 그림자가 진 부분은 살짝 어두웠지만 대체로는 따뜻한 햇빛 속에 있었다.

 저 쪽 집은 좀 어두워서 불을 켰겠구나. 이 쪽 집은 햇빛이 교묘하게 가리지 않고 잘 들어오는 운 좋은 집.

 


 

                  



 

 

 잦은 이사의 경험으로 새로운 집에 들어갈 때는 지난 집들의 단점들을 보완하며 옮겨갔었다.

 


 처음 살았던 아파트 3층의 집은 동이 세 개짜리라 관리비가 좀 비쌌고. 층이 낮아 일층에 지나가며 두런두런 나누는 얘기 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집안으로 들어왔었다. 특히 여름밤 창문을 열어놓고 달빛 보며 누워있으면 산책 나온 동네 사람들의 개인사가 쏙쏙 귀에 박혀 잠을 설칠 지경.

 


 

 높은 집으로 가야겠구나 싶어 17층으로 옮겨 간 집은 여전히 단지 세대는 작았지만 앞이 뻥 뚫려서 경치가 좋았다.

 서울이긴 한데 싼 집 찾아 외곽으로 빠지다 보니 베란다 밖은 낮은 야산에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았지만. 바로 옆에 트럭터미널이 있어 건널목이 항상 위험했다. 버스도 몇십 분에 한대씩만 와서 지각을 밥먹듯이 했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한다고 급하게 화장을 하고 있는데 웬 말발굽(?!) 소리가 들려 창 밖을 보니 도로에 사람을 태운 말이 지나가고 있었다. 엥?! 이게 뭔 풍경인가 싶어 신랑과 한참을 웃었었는데. 주말에 그 야산에 들어가 돌아다니다 보니 저 쪽 야산 너머에 천막들이 쳐져있고 실제로 말 몇 마리가 묶여 있는 모습도 보였다. 무슨 연유로 거기 사람이 살고 말이 묶여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집은 경기도 어디에 있는 새집이었는데 2층이었고, 밑에 1층은 복도로 뚫려 있는 집이었다.

 개구쟁이가 실컷 뛰어놀아도 좋을 집이었는데 아이는 아직 없었다.

 주변에 아기자기 상가도 있고 해서 장보기는 좋았지만 문화시설이 없어 좀 외로웠다.

 백화점도 멀리 나가면 딱 하나 있었는데 뭔가 좀 정이 안 가서 잘 들르지 않게 되었고.

 오밀조밀 낮은 건물들 사이로 무수히 많은 가게들이 있었지만 발이 닿을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결정적으로 비가 오는 날에는.

 세탁기가 있는 부엌 옆 다용도실의 하수구에 물이 역류해서 올라왔다

 딱 결정적인 부분까지 찰랑찰랑 차오르다가 비가 그치면 내려가곤 했는데 저층에 물이 역류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몇 개월 뒤에는 부엌에 싱크대까지 물이 역류했었다.

 

 

 아이를 낳고 친정 근처로 이사를 갔을 때는 전철역이 바로 앞에 있고 공기가 좋았다.

 서울이 아니라 출퇴근 시간이 1시간 반씩 하루 3시간이 걸렸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전철이 종점에서 종점이라 맘 놓고 잘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장점.

 근데 근처에 어디 골프장이 있다고 하더니.

 한 겨울에 멧돼지 출몰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고.

 아이와 나간 산책에서 야생너구리를 만났다! O.O

 처음에 세 마리가 무리 지어 지나갈 때는 크기가 개만 해서 정말 개인 줄 알았는데. 이게 생김새가 암만 봐도.. 너구리..

 오동통하고 귀여울 줄 알았던 너구리는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좀 무서웠다.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는 걸 보니 사람을 별로 피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다음 집은 저 집 아래아래 집으로 다시 이사.

 

 

 그다음 집은 근처 아파트였는데 고층이라 현기증이 났다.

 웬일인지 예전에도 살아봤던 16층의 높이였는데 뻥 뚫린 부엌 베란다 밖이 무섭고 어지러웠다.

 다음에는 다시 낮은 층으로 가야지..

 신랑이 주재원으로 밖에 나가 살던 시절이라 이사를 하지 말고 눌러살아야지 했는데 마침 전셋값이 미친 듯이 올라가던 시절이라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을 했다.

 맞벌이를 해도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가 없다. 사정을 봐주시라.

 집주인분은 그럼 얼마가 가능하냐고 하시길래. 그 오른 돈의 반을 얘기했다.

 쿨하게 그럼 그러자 하시며 며칠 뒤 추가계약서를 등기로 보내주셨다.

 

 

 다음 집은 3층. 단지의 맨 바깥쪽에 있어서 가린 건물이 없다 보니 저층인데도 하루 종일 해가 잘 들었다.

 단지 집이 좀 오래되고 그전까지 사셨다는 분이 집을 좀 험하게 쓰셨는지 마루가 낡아서 맨발로 다니면 나무 가시가 박히곤 했다.

 그래도 종일 따뜻한 해가 드는 그 집이 참 좋았다.

 


 

 그리고 선택한 지금의 집은 처음에 집 보러 들어오던 날 딱 반해서 바로 계약을 했었다.

 베란다 트지 않고 층은 낮은 쪽이 좋아요. 했더니 특이하시네요. 보통은 반대를 원하시는데.

 집이 오밀조밀 수납공간이 많고 사시던 가족의 사모님이 손재주가 돋보이는 아기자기 이쁜 집이었다.

 그다음 날도 다시 한번 신랑과 함께 와서 보고 갔었는데.

 

 아. 망했다.

 해가 안 든다.

 정남향도 아니고. 고층의 아파트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단지라.

 해를 서로 가리고 있었다.

 아침에 잠깐 우주선 레이저 같은 강한 햇빛이 어슷한 각도로 강하게 쬐어들어오다 방향을 일순간에 틀곤 사라진다.

 해가 왼쪽에 있는 동에 가려졌다가 나타났다가. 레이저를 쏘고. 다시 오른쪽 동 뒤로 숨었다가. 멀리 사라지니.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집은 퍽이나 답답하고 우울했다.

 집에선 무언가를 할 의욕이 사라질 정도로.

 나는 봄이 되어도 봄인 줄 모르고 살았다.

 

 

 

.

.

.

.


 



 

 다음 집은 꼭 해가 잘 드는 집으로 가야지 맘먹고 있다.

 조카 사는 이 동네도 몇몇 동만 빼고는 동끼리 해를 가려 운 좋은 고층 몇 집만 해가 비췄다.

 아. 고층은 또 싫은데.

 흐드러진 꽃나무들이 너무 이쁘긴 한데 햇빛에 비할 수는 없지. 어차피 고층에 올라가면 꽃 같은 거는 보이지도 않는다.

 


 

 아이들 뛰어노는 놀이터와 내가 앉아 있는 벤치는 따뜻했다.

 반팔을 입고 씩씩하게 땀을 흘리며 노는 아이들이 이쁘고 싱그러웠다.

 목마르다고 뛰어오면 준비해온 귤을 까서 반개씩 입에 넣어주고 또 뛰어놀라고 했다.

 


 

 한참을 뛰어놀던 조카가 오더니 좀 피곤하단다.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길래.

 아. 그래. 집에 갈래?

 이모는요?

 이모는 누나랑 집에 가야지.

 왜요. 우리 집에 가요.

 형도 와 있을지 모르고 아빠도 오셔서 쉬셔야쟎어.. 주말이니까.

 이모는 또 놀러 올게.

 아. 그럼 이모집에 가서 쉬어야겠어요.

 응? 너 피곤하다면서. 이모집에 가려면 버스 타야 하는데.

 괜찮아요. 거기 가서 쉴래요..

 

 ㅎㅎ.. 그리 뛰어놀아 피곤해 죽겠는데도 미련이 남아 이모집에 가서 쉰단다.

 오케이~ 가자. 이모가 만두를 구워주마! 계란도 삶아주고.

 오락도 실컷 하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까르르 키득거리는 두 녀석이 웃긴다.

 남매를 키우면 이런 느낌일까.

 궁합이 잘 맞는 사촌이라 참 다행이다.

 다음 주에도 또 놀러 와야지.

 언니는 첫째가 중학생이라 토요일에도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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