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표현의 뉘앙스 읽어 보기
"나는 좀 늦는데 먼저 좀 챙기고 있어 ㅋ"
"내가 그날 날짜가 안되는데 바꿀 수 있나? ㅋ"
톡을 주고받으며 'ㅋ' 하나를 문장 끝에 붙이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이것 또한 내가 절대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남이 쓰는 걸 보면 괜히 눈에 띈다. 근데 어떤 뉘앙스인지는 알 것 같아 정리를 해보려 한다.
우선 주위에 쓰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80년대 초반생들이 많았다. 회사에서 보는 그들은 대략 나보다 5년 정도 경력이 더 많아서, 내가 신입사원일 때는 대리로, 그 이후에는 계속 근거리에서 업무 하게 되고 일종의 짝꿍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걸 보면 "ㅋ"는 후배한테 쓰기에 적절한 것일까? 아니면 그 세대가 자라면서 익힌 인터넷 문화로부터 생긴 일종의 말버릇일지도 모르겠다.
"ㅋ"의 뉘앙스를 한번 따져보자.
유쾌하고 모든 게 좋은 상황이라면 'ㅋ' 하나에서 끝나지 않고 "ㅋㅋ"나 "ㅋㅋㅋ" 또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로 확장된다. (이 글에서는 "ㅋ"과 "ㅋㅋ"의 차이는 다루지만, "ㅋㅋ"와 "ㅋㅋㅋ"의 차이는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상황이 영 좋지 않으면 'ㅋ' 하나도 붙일 심적 여유도 없다. "나는 좀 늦는데 먼저 좀 챙기고 있어 ㅋ"는 '내'가 늦더라도 다른 사람이 먼저 충분히 챙겨줄 수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담겨있다.
반면에 '내'가 늦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챙겨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예 말의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가령,
"나 좀 늦어지는데, 시간 좀 잘 때워줘. 한 10분 내로 갈 테니까 죄송하다고 말씀 좀 전해주고!ㅠ"
명백히 남이 상황을 make-up 해줄 수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ㅋ' 하나를 붙인다면 시간을 때워줄 후배에게 별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나 좀 늦어지는데, 시간 좀 잘 때워줘. 한 10분 내로 갈 테니까 죄송하다고 말씀 좀 전해주고 ㅋ"
대화를 하다 보면 상호 뜻이 안 맞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이 경우 설득과 논리를 통해, 또 빠른 업무 추진을 위한 상급자의 의사 결정을 통해 하나의 의견으로 정해지는 합의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드러내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당장은 어떤 합의점을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그냥 '난 의견이 달라요'라는 뉘앙스만 전달할 수 있어도 충분할 때가 있다. 이때 의도를 전달하면서도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않는 기술이 'ㅋ' 하나다.
'내'가 의사결정자는 아니기 때문에 내가 결정할 수는 없지만, 빠른 추진을 원하는 상황. 반면에 다른 사람은 돌다리를 두들기며 가길 원하는 상황. 그렇다면 '나'는 이 정도로는 우선 이야기를 하면서 교묘하게, 영리하게 너와 나의 의견이 다르다는 점을 확실히 알릴 수 있다.
"그거 다 고려하면 못할 거 같아요 ㅋ"
만약 "그거 다 고려하면 못합니다."라고 'ㅋ' 하나도 없이 썼다 간 듣는 사람에 따라 싸우자는 의미로 들릴 수가 있다. 쿠션이 하나도 없는 표현이 되어버린다.
"내일 올 때 그것 좀 챙겨 와 ㅋ"
'내'가 할 수 없으니 남이 해줘야 하는데 그 일 자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ㅋ'을 하나도 안 붙이면 왠지 명령조의 뉘앙스가 전달될 것 같다. 남이 해주긴 해야 하는 일이긴 하나 강한 명령이 아니어도 충분히 청자가 말을 알아듣는 상황이면, 분위기 좋게 이야기하고자 'ㅋ' 하나는 적당할 수 있다.
"부장님, 저 조금 늦을 거 같습니다 ㅋ"
존댓말에 'ㅋ' 하나가 합쳐지니 금방 비꼬거나, 불손한 태도의 표현으로 바뀌어버린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쓰고 싶거든 사람 가려가면서 써야 하겠다.
"웃는 게 완전 개그맨 XXX 같다 ㅋ“
예를 들어 이런 말을 하면서 모두의 공감을 사서 웃음을 유발한다면 좋은데, 아무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ㅋ' 하나를 붙임으로써 자기가 먼저 가볍게 웃고 살살 분위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좋은 반응이 나오면 좋고, 나쁜 반응이 나와도 뭐 아무렴 어때라고 그냥 뻔뻔하게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ㅋㅋㅋㅋ'로 웃어 버리면 남들은 안 웃긴 상황에 자기 혼자 진지하게 유머를 구사하며 남을 웃기려고 힘을 준 것처럼 보이기가 쉽다. 즉, 없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ㅋ' 하나가 적절하다.
서두에 나는 'ㅋ' 하나를 안 쓴다고 했다. 친구들이나 후배에게도 잘 쓰지 않는다. "ㅋ"이 되게 어울리는 때가 있는데 그걸 안 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손이 좀 더 아플 순 있지만 상황을 조금 더 설명하는 식으로 풀거나 'ㅎ' 하나 등으로 바꾼다. 나의 개인적인 미감 상 'ㅋ'은 친구나 후배에게도 건방져 보일 것 같지만, 'ㅎ'는 조금 더 중립에 가깝다. 이것도 한번 따져볼까?
예를 들어, 내가 선배이고, 후배한테 늦어지는 상황을 설명해야 할 때,
"나는 좀 늦는데 먼저 좀 챙기고 있어 ㅋ"
대신에,
"나 좀 늦는데 먼저 좀 챙겨 줄 수 있을까?ㅎ"
이 표현이 내가 쓰는 방식이다. 후배여도 부탁은 부탁이고, 부탁은 공손해야 하는 법이라고 믿는다.
이 글의 초안 일부를 애독자에게 먼저 보내줘 봤다. 그러자 반응이 재밌다. 일부러 나에게 3가지로 반응을 해줬다.
1) "읽어볼게 ㅋ"
2) "읽어볼게 ㅋㅋ"
3) "읽어볼게 ㅋㅋㅋㅋㅋㅋㅋㅋ"
셋 중에 무엇일지는 안 알려준다고 했다. 이 3개에 대해서 내가 붙인 해석은 각각 다음과 같다.
1) 읽어볼게 ㅋ : 네가 읽으라고 하니까 읽어준다. 대신 시간될 때 내가 알아서 할게.
2) 읽어볼게 ㅋㅋ : 재밌겠는데 ㅋㅋㅋ 기대된다. 빨리 읽어봐야지. (아니면 오히려 기계적인 아무 생각 없는 "ㅋㅋ"일 수도 있음)
3) 읽어볼게 ㅋㅋㅋㅋㅋㅋㅋ : 또 썼어? 또 읽어보라고? ㅋㅋㅋㅋㅋㅋ 맨날 글 쓰고 반응 궁금해하고 너무 남 의식하는 거 아니야? ㅋㅋㅋㅋㅋ
이 글에서는 'ㅋㅋ'와 'ㅋㅋㅋㅋㅋㅋㅋ'의 차이에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위 사례를 보면 명백히 차이가 있어 보인다. 대신 쓸 말이 많을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 'ㅋ'이 5개가 넘어가는 순간이면, 대략 엄청 배꼽 잡을 정도로 재미있거나 또는 비웃거나, 우습거나에 대부분 포함되는 듯하다. 혹시나 생각이 더 무르익으면 또 다뤄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