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가 약하면 강팀이 될 수 없다
기획 업무와 운영 업무
프론트 오피스와 백 오피스
돈 버는 부서와 돈 쓰는 부서
전자와 후자들 중에 어떤 직무를 수행하고 싶느냐는 개인의 성향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대개 회사에서 주목받는 업무는 전자이다. 스포트라이트와 보상 등이 잘 따른다. 그렇지만 후자가 없이는 회사가 굴러갈 수는 없다.
축구에 환장하며 산다. 실제로도 운동을 즐기고, 좋아하는 해외 축구팀의 경기를 주말마다 찾아본다. 런던에는 두 번이나 직관하러 갔다. 또 각종 전술 책과 감독들의 전략에 대한 책도 가끔 읽어볼 정도다. 축구계에서 가끔 듣는 말이 있다. 한 경기를 이기려면 공격이 강해야 하고, 시즌을 우승하려면 수비가 강해야 한다는 점이다. 수비가 강하다고 강팀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수비가 약하면 강팀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회사도 그럴 것이다. 비록 주목도가 떨어지지만 뒷단의 업무들이 무너지면, 절대로 회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아가더라도 금방 무너지지 않을까.
보통 기획/프론트/돈 버는(이하 "기획") 업무 담당자들의 기고만장함을 본다. 나도 그런 일을 담당할 때는 그런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회사의 수익을 이끌고 새로운 사업을 진행시킴에 따라 회사를 성장시킨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가게 된다.
반면 운영/백/돈 까먹는(이하 "운영") 업무 담당자들은 반대로 초라해진다. 자잘한 업무에 디테일을 챙기느라 더 꼼꼼하게 처리할 게 많고, 예민해진다. 가령 돈을 직접 집행하는 업무를 하려면 각종 비용 지출 규정과 정산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실수가 발생하면 금방 감사팀에 끌려가게 된다. 이러는 데도, 주목을 받지 못한다. 웃지 못한다. 고과가 좋지 않다.
귀찮은 업무들 투성이다. 예를 들어, 기획 업무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의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기획/운영 담당자의 업무를 칼로 두부 자르듯 나눠봤다. 현실은 기획 담당자라고 해서 운영 업무를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다.)
"A사와 계약 체결하기로 했으니까 계약서 체결해 줘."
이 말로 기획 담당자는 계약 업무를 잘 마무리 지었고 끝이 났다. 이어서 뒷단의 업무를 서포트하는 담당자는 다음 일들을 다 챙겨야 한다.
계약서 초안 작성 : 양사 중 어느 회사의 계약서 초안을 중심으로 먼저 작성해 나갈 지도 검토가 필요하다.
계약서 초안 각사 법무팀 검토 : 자잘한 자구부터 크리티컬 한 업무 내용까지 면밀하게 검토되고, 수정이 거듭되며 양사의 계약서 버전은 업데이트된다.
계약 체결 품의 : 양사 법무 합의된 계약서를 바탕으로 사업과 계약에 대한 내부 결재를 받는다.
운영 담당자도 자기 업무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늘 기획 담당자의 업무 요청과 그에 대한 대응. 또는 굴러가고 있는 사업에서 발생하는 각종 민원, 리스크에 대한 대응을 하는 것은 누가 잘 알아주지도 않아서 힘이 든다. 꼬우면 기획 직무로 옮겨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직 전반의 관점에서 현재 운영 업무 담당자가 기획 업무로 옮긴다고 하여, 운영 업무에 필요한 사람이 갑자기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그 업무는 남아있다.
신생 회사로서 신사업으로 커 온 회사에 있다 보니, 기획 담당자가 누구보다 주목을 받고 모두가 그 일을 하고 싶지만 점점 회사 몸집이 커짐에 따라 벌여놓은 사업의 운영, 정산, 민원 업무 등 처리할 게 많아지고 있고 업무 로드가 늘어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업무를 누군가는 해야 하니 담당자들의 불만이 점점 느껴진다. 반면 경영진이나 조직장은 운영 업무는 성과가 되질 못하니 아무래도 관심이 덜하다. 어떻게 해야 기획과 운영 사이에 조직 운영의 묘를 가져갈 수 있을까?
운영 업무로 피곤해하던 한 동료의 말이다.
"이전 조직장은 기획 담당자는 일부러 더 깐깐하게 대하고, 운영 담당자를 치켜세우고 더 챙겨줬었어요. 그래서 조직 분위기가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나요."
모든 조직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 언급 안 하고 있어도 자연스럽게 기획 담당자는 떠오르게 되고, 운영 담당자는 가라앉는다. 보통은 그런 기획 담당자를 더 치켜세우고, 운영 담당자는 눈에 띄지 못한다. 빈익빈 부익부다. 반면 동료가 이야기한 이전 조직장의 태도는 어느 정도 담당자들 간의 균형을 맞춰 나갈 수 있는 묘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영 담당자에 대한 조직장의 관심이 단순히 그 직원의 기분이 좋아지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획 담당자는 자기가 돌파해 나가는 업무를 자기가 원하는 속도대로 빠르게 열과 성을 다해 줄 서포터 동료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획/운영 사이의 간극이 크다면, 사람인지라 운영 담당자는 괜히 기획 담당자를 질투하게 되고, 진심으로 신사업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업무 서포트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회사의 손실이다.
운영 담당자의 업무는 단순 반복 업무가 많다. 회사가 재미 없어지기 쉽다. 자신의 가치를 잘 평가해 주는 곳으로 이직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회사에 발생한 민원인의 문의를 형식적으로 대하면서 회사의 평판을 의도치 않게 깎아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회사의 손실이다.
기획/운영 사이에 서로의 업무를 높게 평가해 줌으로써 선순환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다. 특히나 운영 담당자들을 어루만져줘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될 때 기획/운영의 구분 없이 모든 업무가 우리 조직의 업무고, 각 담당자들이 하나의 팀으로서 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조직 내 프로젝트를 근거리에서 수행함(기획 업무)과 동시에 프로젝트 인력 관리 및 지원 업무(운영 업무)도 맡게 되었다. 몇 달째 계속 나 혼자 이 운영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문득 오늘 몹시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쭉 써보았다. 귀찮은 업무는 귀찮다. 누군가 그냥 매일 한다고 해서 안 귀찮은 것은 아니다. 위의 운영 업무를 하는 동료만이 나에게 이 업무, 아무도 몰라주는 업무 하는 거 고생한다고 말해주어 고마웠다.
고생을 해본 사람이라야 고생을 알아주는데, 대개는 운영 업무만 주로 해온 사람이라면 또 조직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니 이를 아는 조직장의 격려 한마디의 가치는 꽤 크다. 또 기획 담당자 중에 운영 업무를 자기의 급을 낮추는 업무인 것 마냥 취급하거나 귀찮은 일을 모르쇠 하는 언행을 볼 때가 있다. 그 업무가 빛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영 업무의 고생을 조직장과 기획 담당자가 알아줘야 좋지만 이런 구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게 아쉽다.
그렇다고 이런 업무는 참... 운영 업무 담당자 본인이 수시로 어필하기도 뭐 한 업무다. (그냥 평가 시즌 면담 때나 한두 마디 언급하며 어필해 본다.) 신사업 추진이나 돈 버는 사업이 아니라, 그냥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게 본전이고 사고가 나야만 주목을 받는 그런 업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에는 그냥 또다시 직장인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곤 한다.
다행히도 이 글을 작성해 두고 발행하기 전까지 묵혀둔 사이에, 팀장에게 운영 업무의 수고로움에 대해 인정을 받고 일을 함께 나눌 동료를 지정받았다… 그런데 그 동료는 팀 이동을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