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다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한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또 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내야 할 감정과 나중에 나타난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촉발시킨 사람에게 즉시 표현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하게 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p. 169)
알랭 드 보통의 글은 이런 점이 좋다. 내가 어렴풋이 갖고 있던 개념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을 해준다는 점 말이다.
만 4세의 아들을 키우면서 답답하게 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행인 것은 그런 순간이 점점 같은 패턴을 보인다는 점인데, 위의 '성숙'의 의미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의 특성을 드러낼 때가 그 순간이다. 쉬운 표현으로 '떼를 쓴다'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것이다.
유치원 하원을 한 뒤 집에서 저녁 먹기 전까지 그렇게 피곤하고 졸린가 보다. 온갖 떼를 쓰게 되는데 놀아주지 않아서, 뭐 안 해줘서, 지금 이걸 엄마아빠가 해줬으면 좋겠는데 안 해줘서, 지금은 다른 걸 해야 하고 저녁 먹고 나서 하자고 해도 막무가내로 울어 젖히고 엄마아빠를 그렇게 비난해 댄다.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손에 쥔 장난감을 던지기도 하고, 아빠를 주먹으로 톡 때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울고 불고 하면 못내 져주면서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울어도 말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말하며 무대응으로 일관해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를 보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 울음을 그치는 시간까지 참을 인자를 열 번도 넘게 써야 하는 인내심은 필수지만.
아들은 아직 어린이이므로 성숙하지 못한 것이 합당하다. 자기가 졸리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또 자기가 졸려서 나빠진 기분("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내야 할 감정")이 든다고 해서 엄마아빠에게 떼쓸 게 아니라("나중에 나타난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기가 기분이 나쁜 것을 아빠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졸리면 조금 쉬든지, 잠을 깨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 보면 될 일이다.
회사에 보면 가끔 어린이들이 보인다. 나이만 든 '어린이'다. 앞서 쓴 글 <키보드 소리의 법칙>의 듣기 싫은 소리 주인들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는 남들보다 더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뛰어나며 회사 생활의 돌아가는 상황을 더 잘 파악하는, 그래서 소위 회사 생활 잘하고, 일 잘한다고 생각하며 성숙한 직장인이라고 느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정의해 준 '성숙'은 혼자만 스스로를 잘났다고 생각해서 얻어지는 타이틀이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핵심인 개념이다. 자기 일이 바쁘고 힘들면 자기 혼자 풀고, 또 합당한 방식으로 표출(상급자와 면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취미 활동 등)을 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남들도 알아 달라는 식으로 티 낼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내야 할 감정과 나중에 나타난 죄 없는 사람"에게 표출하는 미성숙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성숙이라는 단어보다 더 익숙한 단어들이 있다. 매너, 예의 같은 것들. 어른으로서 조금 더 매너 있고, 예의 있게 자기의 선을 지켜가며 회사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숙한 직장인이 되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물론 나도 계속 노력 중이다.
* 참고 문헌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정영목 역, 도서출판 청미래,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