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 수업 05. 인사동에서 장비 마련하기
수업에서 배운 다도를 집에서 매일 실습해 보려면 기본적인 다구가 필요하다. 수업이 끝난 뒤, 한 도반과 필요한 다구를 사기 위해 인사동거리를 걸었다. 나는 어설프게나마 다기 세트라도 가지고 있지만, 도반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은 도반을 위한 장비 마련의 날이다.
도반이 마련할 다구 중 다불(茶拂)과 다건반(茶巾盤)은 내게도 필요한 다구였다. 다불은 다기에 남은 찻잎 가루를 쓸어낼 때 사용하는 붓이고, 다건반은 다불을 내려놓는 받침이다. 다불과 다건반은 집 안에서 대체할 만한 것을 구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한동안 얼굴 마스크팩을 바를 때 쓰는 짧은 붓을 다불처럼 써보았지만 너무 짧아 불편했다. 다불과 다건반은 다구점에서도 잘 팔지 않아 서예용품을 파는 필방(筆房)에서 서예붓과 문진을 구입해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고 수업에서 들은 적이 있다. 서예붓을 다불로, 문진을 다건반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인사동을 돌아다니며 들렀던 필방의 붓은 다불로 쓰기엔 너무 길고, 문진은 다건반으로 쓰기에 짧았다.(다건반에는 다불茶拂을 비롯해 사시渣匙, 다협茶夾 등 총 세 개의 다구가 놓인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우리는 서서히 지쳐갔다. 장비 마련은 즐거우면서도 다리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다. 그래도 도반의 기본 다구 마련을 위해 부지런히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그러던 중 한 골목길 어귀에서 도반이 <보이차>라는 글씨를 가리켰다. 다가가보니 다원이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차를 마시고 계셨다.
도반은 이런저런 다구를 손으로 잡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고, 우선 다호와 다배 한 세트를 구입하기로 했다. 다원 안에는 차향이 가득이었다. 우리는 다구를 구입한 기세로 사장님께 "차 한잔 주세요"라고 말했고, 사장님은 흔쾌히 "앉으세요" 하셨다.
다도 수업에서는 많은 다구를 사용하지만, 사장님은 개완(蓋碗, 1인용 찻잔) 하나만으로 차를 우리셨다. 중국에 자신의 차밭이 있다고 하셨고, 그곳에서 가져온 차를 파시는 거라고 하셨다. 사진첩을 펼쳐 보여주시며 차의 종류와 차나무, 차를 만드는 과정 등을 보여주셨는데, 차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분으로 보였다. 그 지식의 결은 우리가 배우는 다도의 결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다도 수업 학생임을 말하자 사장님은 흥미를 보이셨다. 수업에 오시라 권유드렸더니, 자신은 배우는 사람보다 가르칠 사람에 가깝다고 하셨다. 차와 오래 함께한 만큼 아는 것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사장님이 다판 위의 물을 붓으로 쓸어내는 모습을 보고 '다불이냐'고 물었더니, "그냥 붓이지 무슨 이름이 따로 있나요?" 하시며 웃으셨다. 그 말을 들으며 나도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왜 그저 붓으로 보이는 것에 '다불'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름을 부를까.
다도 수업에서는 모든 다구에 이름을 붙이고 부른다. 거기에 마음을 모은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마음을 부르는 일이다. 언젠가 나와 도반들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거나, 이름이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도 자리에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다구들을 두고 그 이름을 부른다. 이름에 눈이 가고, 손이 가고, 마음이 간다.
이날 나는 다불은 구하지 못하고 다건반 하나는 구할 수 있었다. 인사동을 걷다 고물상들이 모여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간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고물상점에서, 다건반으로 쓸만한 것을 발견했다. 먼지가 내려앉은 옥색의 길쭉한 도자기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값을 치렀다. 단돈 2천 원에 팔린 물건이지만 빨간 꽃을 품고 있는 그 도자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자리에 맞는 물건이었다. 다건반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가게 주인은 그 도자기를 누군가 붓글씨를 연습했던 한지에 싸 주었는데, 포장이 퍽 멋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와 포장을 풀고 먼지를 닦아 다도 자리에 놓으니, 이름 없던 도자기는 '다건반'이 되었다. 이제 마음을 부를 이름 하나가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