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어촌 청소년과 만들어가는 새로운 배움의 공식
우리 동네에서는
할 만한 일이 없어요
농산어촌의 청소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우리 동네에서 ‘할 만한 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통 청소년들에게 할만한 일이라고 하면 ‘놀이’가 많이 포함됩니다. 보통 청소년들이 말하는 놀이는 피시방, 방탈출, 만화방, 당구장, 보드게임장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는다=논다’라는 공식이 적용되는 농산어촌 청소년들에게 '동네에서 놀다'라는 의미는 공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포함합니다.
청소년들에게 ‘할 일’은 곧, ‘놀이’ 그리고 ‘공간’으로 이어집니다. 이 공간은 청소년들이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그냥 모여서 떠들 수 있는 곳들로 우리가 시골이라고 생각하는 곳들까지 진출한 베스킨라빈스, 이디야, 파리바게트, 롯데리아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브랜드 공간들의 위치 여부에 따라 농산어촌도 ‘급’이 나눠집니다. 청소년들에게는 이 지표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제가 보기에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동네인데 청소년들은 ‘에이 거기가 어떻게 우리랑 같아요’라는 말들을 합니다. 이들에게 내가 사는 곳의 ‘급’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24시간 운영하지 않는 롯데리아가 청소년들의 거점이라면 여기는 청소년들에게 시골 중의 시골입니다. 하지만 스타벅스와 버거킹이 들어서고, 같은 업종이라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면 여기는 놀만한 시골이 됩니다.
청소년들과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대부분의 동네에 청소년수련관, 청소년문화의집 등이 존재하는데* 왜 친구들과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바로 떠올리지 않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를 궁금증을 담은 질문을 던졌을 때, 청소년들은 이 공간들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알더라도 부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시·도지사 및 시장·군수·구청장은 시·군·구에 1개소 이상씩의 청소년수련관을 설치·운영 해야 하고 읍·면·동에 청소년문화의집을 1개소 이상 설치·운영해야 함(청소년활동 진흥법 제11조)
청소년들이 패스트푸드나 프랜차이즈 카페를 자신들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우리끼리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곳’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이는 어떤 목적을 정해놓고 사용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날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공부를 해도 되고, 수다를 떨어도 되고, 게임을 해도 되는 그런 공간이요.
롯데리아나 베스킨라빈스는 누구에게나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청소년에게 방문 목적을 묻지도 않죠. 이는 10대에게 편안함 줄 수 있습니다.
‘청소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청소년이 자신들의 공간으로
인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청소년수련관이나 청소년 문화의 집이 청소년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청소년’이 제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공간을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공간을 만들 때에 직접 설계와 기획부터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청소년수련관이나 청소년문화의 집이 환영받기 위해서는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공간을 채우기보다 청소년들이 친구들과 편안하게 쉬어가고 대화하고 시도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그라운드 룰과 분위기를 만드는 게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계획부터 실행까지 청소년들에게 직접 맡겨보면 어떨까요? 최근 하남시는 청소년수련관에서는 ‘청소년 관장’을 선출했는데요. 청소년들의 의견을 반영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공간에 대한 역할을 주는 기회가 보다 확산되어야 합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청소년들에게 지역의 스타벅스와 도시의 스타벅스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주변에
‘할 거리’가 많아요
청소년들과 대화를 해보면, 처음 도시를 방문했을 때에는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방탈출이나 옷가게 구경을 하지만, 이런 활동을 몇 번 경험한 뒤에는 지역에서와 똑같이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도시가 좋은 이유는 ‘당장 무언가 하지 않아도 주변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보여서’였습니다. 결국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든 ‘하고 싶다’ 마음먹었을 때 주변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리들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할 일은 엄청난 것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이면 충분합니다.
멘토리의 미션은 청소년들이 지역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 어른이 정한 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며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농산어촌의 청소년들과
지역에서의 삶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그렇기에 청소년들이 지역에는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머무는 데에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할 일’이라는 것에 대해 그들과 함께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예술의전당, 홍대 걷고 싶은 거리, 롯데월드와 같이 도시에만 있는 랜드마크나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동네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답에 도달했습니다.
보통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험한 일을 우리의 방식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청소년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만드는 [to do], 우리 동네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보는 [to work], 두 가지로 ‘할 일’을 정의했고, 농산어촌에서만 할 수 있는 3단계의 험한 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여행을 통해 우리 지역 곳곳의 매력을 발견하고 청소년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탐험의 과정에서 시작해 지역 자원의 도움을 받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실험해보는 ‘보통이 아닌 프로젝트'를 지나 지역에서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상상하는 ‘里모델링 프로젝트’까지 멘토리는 지역의 청소년들과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며 농산어촌에 필요한 리얼 월드 러닝 모델을 설계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멘토리가 왜 험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했다면, 다음 글을 통해서는 청소년들과 농산어촌에서 어떤 일들을 벌렸는지에 대해 소개드릴 예정입니다. 어떤 3험이 아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음 글에서 확인해주세요.
글. 멘토리 이사장 권기효
편집. 씨프로그램 러닝펀드 매니저 문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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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ontherecord/218
러닝랩 펠로우십(Learning Lab Fellowship)이란
씨프로그램은 지난 2년간 러닝랩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배움에 대한 여러 시도를 지켜봐 왔습니다. 동시에 의미 있는 실험이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과 환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고 수많은 만남과 고민 끝에 2019년 11월 러닝랩 펠로우십을 시작했습니다. 러닝랩 펠로우십은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배움의 환경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실행하는 팀을 대상으로 지금 필요한 작업을 이행하기 위한 유연한 자원을 제공하며,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합니다.
멘토리는 농산어촌 청소년에게 리얼월드러닝의 기회가 열려있음을 믿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러닝랩 펠로우십을 통해 농산어촌 청소년들의 멘토가 될 수 있는 어른들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을 목표합니다. 농산어촌에서는 어떤 배움이 가능할지 그 시도의 기록을 매달 한편씩 시리즈로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