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 고전 나눠 읽기-에밀 편
온더레코드 프로그램, '(혼자서는 절대 안 읽는) 교육학 고전 나눠 읽기'는 언젠가 꼭 한 번은 읽어봐야지, 하고 여러 번 다짐만 했던 좋은 교육학 고전 도서들을 함께 나눠 읽고 의견을 나눕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읽어봐야지
내용이 그렇게나 알차다는, 직접 사서 읽어도 돈이 하나도 안 아깝다던, 유명 작가 누구누구도 추천했다던 책들은 왜 그렇게 손이 잘 안 가는 걸까요? 두꺼운 전공 고전들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내가 ~를 전공했는데. ~의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하는 부담감은 책 위의 먼지와 함께 쌓여갑니다. 이번에 온더레코드에서는 모두가 제목은 익히 알고 있지만 어쩌면 서가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교육학 고전을 나눠 읽었습니다.
온더레코드의 온라인 모임 실험 '교육학 고전 나눠 읽기'에서는 첫 책으로 교육학 고전 <에밀>을 재료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혼자서는 읽기 힘든 책 <에밀>을 총 다섯 파트로 나누어 각자 읽을 파트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17일 zoom으로 만나 각자 읽은 파트에 대해 설명하고 인상 깊은 한 줄과 함께 대화 나누면 좋을 질문을 공유했습니다. 그 날의 대화에서 등장한 다양한 질문과 그에 대한 생각을 전해드립니다. 혼자 <에밀>을 읽고 있다면, 함께 나눈 질문을 따라가며 답해보세요. 생각의 지평을 훨씬 넓힐 수 있을 거예요.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교육서 <에밀>은 출간된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교육학의 고전 중 고전으로 불리는 책입니다. 책에서 루소는 [에밀]이라는 가상의 소년을 설정하여 에밀이 출생부터 성년기를 거쳐 배우자를 찾아 가정을 꾸리기까지의 긴 과정에서 교육의 역할과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과 교육에 대한 에밀의 교육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Q1. 루소는 교육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내적인 성장은 자연의 교육, 이용하도록 가르쳐 주는 것은 인간의 교육, 인간과 접촉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사물의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루소는 설명했습니다. 이 중에서 루소는 자연의 교육을 강조하며 인간의 교육도 ‘자연에 맡기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자연주의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자연주의 교육, 자연에 맡기는 교육은 어떤 교육일까요?
1,2,3,4부를 관통하는 루소의 자연주의는, 산이나 들판 같은 실제 자연(Nature)을 가리키기보다도, 더 넓은 의미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내버려 둔다는 말도 의미가 통하는 것 같고요. 교사가 에밀, 학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주는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아이가 최대한 스스로 느끼도록 존중하는 것을 일컫는 것 같습니다.
Q2. 루소는 '인간을 약하게 하는 것은 힘과 욕망 사이의 불균형'임을 주장하며 어린아이에게 한계 짓는 것을 가르쳐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게 한계를 알려주지 않고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시험해보도록 하는 게 상식적인데 어린아이에게 한계를 일찌감치 알려주는 것,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어른인 현재에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 구분을 어릴 때부터 훈련했다면 좀 덜 어려웠을까요? 루소가 아에게 한계를 알려주는 것은 아의 가능성을 한정 짓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음식을 무리하게 많이 먹을 때, '많이 먹으면 체한다'라고 미리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한계를 깨닫도록 경험하게 하는 것이 루소가 지향하는 교육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Q3. 에밀에서 루소는 유한한 세상에서 무한한 것을 구하려는 것이 인간의 고통의 주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는데, 여기서 인간의 약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리고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루소는 자신의 모든 철학적 사유는 유신론적 관점에서 시작되는데 루소가 언급한 '인간의 약함'도 이러한 관점과 연관이 있습니다. 신을 설정하고, 그 기원이나 우주론을 이야기할 때에 우주적 질서와 우주의 운행 법칙, 생성과정 등은 인간이 알 수 없다고 가정합니다. 그런 진리에 도달하는 것에 인간은 한계를 갖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약함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또한 인간의 수명도 현실적인 능력도 제한되어있으니까 인간의 약함을 강조한 것 같아요.
Q4. 루소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갖게 되는 정념에 대해 제대로 방향을 잡아줄 수 없다면 전혀 모르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법에 대해 묻는 아이에게 '아이를 낳는 것은 소변을 보는 것과 같다'라고 이야기하는 예시를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정념에 대해 어른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것이 괜찮을까요?
루소는 아이에게 거짓으로 교육하는 것을 굉장히 경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묻는 아이에게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우회적인 답을 하는 까닭은, 해당 연령대의 아이들을 고려했을 때에 정확한 해답이 아이에게 또 다른 정념을 낳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당장의 궁금점은 해소하되 더 이상의, 해당 시기에 불필요한 정념을 갖지는 않도록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해당 부분에서 루소는 실제로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라고 에밀에 적었습니다.
Q5. 루소는 선의 개념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동정심을 통해 가르치라고 제시합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교육이 많이 일어나는데, 주거환경이 불안정하거나 먹거리가 충분치 않은 제3 세계 어린이들의 영상을 보여주고 감사함을 가르치는 것이 그 예시입니다. 그러나 최근 이런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어나고 있는데 무엇을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과거에 반복되어온 그런 식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친구들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처지에 스스로 감사해야 할 일은 아닐뿐더러 그런 교육은 아이에게 비교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힘듦 자체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임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남이 더 힘들고 내가 더 힘들고 하는 비교를 하게 만드는 교육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보다 더 힘든 친구들이 있으니 내가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식의 생각은 아이에게 죄책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남을 동정하기보다 함께 분노하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동정하는 일은 현재의 자신보다 그가 더 아래의 위치에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런 호혜적인 시각은 수평적일 수 없고 위계적 질서를 만듭니다. 그런 질서 속에서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예를 들어 가난한 친구는 언제나 값싼 옷을 입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이런 편견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책 <에밀> 속 가상의 소년인 에밀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빠르게 습득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인 루소의 가르침을 따라 루소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라납니다. 가정환경부터 결혼 상대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에밀의 성장기에는 삶의 다양한 불행들이 모두 배제되어있기 때문에 루소의 책 <에밀>은 다소 이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가 당시에 생각한 좋은 교육에 대한 정의기 시기별로 드러나있고 그 속에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루소의 인간관이 드러나 어떤 이상점의 방향과 위치가 제시되어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의를 지닙니다.
에밀뿐 아니라 혼자 한 권을 읽기엔 무거운 교육학 고전들이 여러 권 떠오르지는 않으시나요? 다음 나눠 읽기에서는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나누어 읽습니다. 온더레코드의 계속되는 새로운 시도를 기대해주세요.
편집&글. 온더레코드 인턴 장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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