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연주 Nov 02. 2018

저녁에

30일 시필사

무엇보다 불을 켜는 건

빈집을 지키던 그림자에게

밥을 먹이는 일


나는 인간적이 되고

그림자는 까맣게 혈색이 돌아

인간의 꼴에 가까워지는

저녁에


창밖에 흘러내리는 저녁 사이로

나무를 옮겨 앉는 새를 보았고

그것을 새의 정치라고 불렀지


밤낮을 만 번쯤 옮겨다니면 서른


안에서 잠갔던 문을 안에서 열고 나갔다가

밖에서 잠근 문을 밖에서 열고, 다시

안을 찾는 저녁을


건너려면 더 많은 습관이 필요해

몸을 바닥에 눕히면

나와 그림자는 서로의 뒷면이 되고


바닥에 닿을수록 짙어지는 게 있다

우주의 9할은 어둠이라고 말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저녁에


저녁의 변두리에서 변두리의 저녁으로 옮아가는 저녁에


몇천 번쯤 낮밤을 옮겨다니다 보면

그대와 함께 덮는 저녁도 있겠지만

나머지 우주의 1할도 빛은 아니라는


저녁에, 문을 잘 잠갔던가

어제의 그림자가 기억나지 않는

무엇보다 불을 끄는 저녁에


「저녁에」, 이현호,『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빈집’이라는 단어부터 쓸쓸해지는데, 불을 켜 그림자를 까맣게 혈색이 돌게 만든다는 대목에서 현웃 터졌다. 하지만, 나무를 옮겨 앉는 새는 떠난 애인 같기도 하고, “건너려면 더 많은 습관이 필요해”라는 문장 앞에 숨은 괄호가 그려져 한숨.


‘빈집’하면 벌떡! 기형도의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가 떠오른다. 기형도 시인은 빈집에 그 사랑을 가두었지만, 이현호 시인은 (사랑이) 부재한 곳에서 살아간다. 생계형 블랙 로맨스다  


“우주의 9할은 어둠” 위로하다가 “나머지 우주의 1할도 빛은 아니라는” 이런 자조, “나무를 옮겨 앉는 새를 보았고 그것을 새의 정치”로 부르는 풍자, 그럼에도 “저녁의 변두리에서 변두리의 저녁으로 옮아가는 저녁에”이런 세밀한 시선이 좋다. 이건 정말이지 쓸쓸해야만 하는 일.


어쨌든 상실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누군가를, 나를,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가장 먼저 반기는 현관 자동 조명처럼 반짝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 그런데, 불안과 걱정 속에서 유머가 가장 많이 탄생한다며?(무슨 소리야!)

#저녁에 #이현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