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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에가는길 Aug 01. 2024

내가 죽는 꿈

죽음이 너무 두려워


 무서운 꿈을 꿨다…. 내가 죽었다. 사인은 다소 황당했다. 나는 사람들과 ‘햄버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자주 했던 건데,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순서대로 바닥에 엎드려 탑을 쌓듯 사람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꿈에서 나는 맨 아래쪽에 깔려있다가 압사를 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세상에서 사라지느라 어떤 인식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중단’되어 있던 나는 어느 순간 정신을 되찾고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이 내 영혼을 이승으로 반쯤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그건 꿈속에서는 일반적인 장례 절차의 마지막 단계 같은 느낌이었다. 들어보니 죽은 사람을 이승에 붙잡아둘 수 있는 도구를 무당한테서 샀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점 같은 곳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에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중에서 내가 제일 억울하게 죽은 거 같아서 슬퍼졌다. 다른 사람들은 진작부터 죽음의 징조가 있었거나 살면서 업보를 많이 쌓았다고 했는데 나는 어린 나이(꿈속의 나는 더 어렸다)에 비명횡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햄버거 놀이를 할 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살려달라고 저리 가라고 소리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다 죽을 줄 몰랐다.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도 않았었다.

 영혼 상태의 나는 곧 집으로 돌아갔다. 생전에 가까웠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었다. 엄마아빠는 나를 볼 수 있었는데 당시엔 이미 장례를 다 마치고 나의 죽음을 받아들여서인지 그리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엄마는 침착하고 차분했다. 내가 이대로 이승에 얼마나 머물 수 있는 거냐고 묻자 일주일이라고 했다. “그럼 일주일 뒤에는?”, “성불되는 거지….”

 엄마의 대답에 첫째로 놀랐고 둘째로 무서웠고 셋째로는 좀 서운했다. 내가 어린 나이에 죽는다면 엄마는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침착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나는 울기 시작했다. 거실 창으로 바깥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울었다. 이대로 가기 싫다며 울었는데 아무래도 장단 맞춰주는 사람이 없으니 눈물이 오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짜내고 날 더 살게 해 줄 방법은 없냐고 물었다. 엄마는 무당에게서 사 왔던 그 도구라도 매주 사줄까?라는데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묻더라도 무당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내 방으로 들어왔다. 정말이지 죽기 싫었다. 내가 그동안 건강 챙기겠답시고 했던 노력이라든지, 삶에서 꽤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이 생각났다. 이대로 성불하거나 환생을 하는 그 모든 것이 너무 싫고 이번 생을 더 누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무섭고 싫고 끔찍한 기분을 느끼다가 화들짝 놀라며 깼다. 알람이 울리기 4분 전이었다.
 


 여러분은 죽음이 무서우신가요? 혹은 생각하고 있지 않거나, 오히려 기다리고 계신가요? 저는 죽는 것이 꽤 두렵습니다. 언젠가는 찾아오고야 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늘 조금씩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무신론자이고 사후세계를 일절 믿지 않기 때문에 더 두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고 저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 꿈의 내용을 보면 제가 단지 존재의 소멸 자체만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 죽음을 미리 예상하거나 대비하지 못하는 것, 어린 나이에(또는 억울하게) 죽는 것,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내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한 복합적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펼쳐졌으니 꿈을 꾸며 끔찍한 기분을 느낀 것도 당연합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멀고 막연한 것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라, 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괜한 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걱정은 사실 매우 현실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일들 중 죽음만큼 반드시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 그런 괴로운 생각 따위 하지 않고 살거나, 종교를 가져서 아름다운 내세를 기대해 보거나, 삶을 연장하기 위한 갖가지 시도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들도 두려움을 깔끔히 제거해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거대한 공포 앞에 딱히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정면승부를 하려는 학파가 있습니다. 바로 '실존주의(Existentialism)'입니다.




 실존주의는 문학, 심리학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철학 사조입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실존주의 심리학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앞서 '정면승부를 한다'고 표현했던 이유는 실존주의에서 다루는 핵심적인 주제가 바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는 주체적인 한 명의 인간으로서 무엇을 선택해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에 대해 논하며, 인간의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슈들인 죽음, 자유, 고립, 무의미 등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실존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확실한 미래입니다. 저와 같은 겁쟁이라면 여기서 잠시 비명을 질러도 좋습니다. 어쨌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단계를 넘어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면 어느 정도 미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지울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다 죽는 겁니다.


 바꿀 수 없는 결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외면하려 합니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의 말에 따르면 회피해 봤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각종 정신적, 심리적 문제들이 죽음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말일까요? 이들에게는 죽음을 초월할 기막힌 수라도 있다는 것일까요?


 실존주의는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이 갖고 태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자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 조건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삶이 언젠가 끝나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에서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건 결코 '언젠간 다 죽는다'는 허무감과 패배감에 젖어 막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존주의에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에 앞서 직면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야 언젠가는 죽겠지'하고 대충 체념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똑바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강렬하고 심각한지, 얼마나 급격히 들이닥칠 수 있는 것인지를 온전히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만 동시에 우리 삶이 얼마나 짧고 희소하며 특별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이 두렵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충실한 삶을 위한 조건입니다.




 어떻게 해야 죽음이나 그에 대한 공포를 피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실존주의적 답은 '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겠습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남은 날이 단 하루일지도 모릅니다. 두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실존주의 심리학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두려움에 굴복하여 무력하게 떠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삶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지휘해 나가는 강인한 존재입니다. 공포를 모르는 것이 강한 게 아니라 공포를 느끼고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강한 것입니다. 삶의 모든 두렵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맞서고 마침내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삶은 한결 가볍고 명료해질 수 있습니다. 꿈의 말미에 저는 죽고 싶지 않다며 울었고 이번 생을 더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가 바랐던 것은 오직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시의 저에게 "살려줄 테니까 네 전재산 줄래?"하고 물었다면 저는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을 냉큼 내놓았을 것입니다.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살이 10킬로 찌든 키가 10센티 작아지든 누가 나를 미워하든 날씨가 더워지든 추워지든 휴대폰이 박살 나든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는 동시에 크게 안도했고 그 하루를 매우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계속 그 감각을 되새긴다면 모든 하루하루가 선물이나 행운처럼 기쁘고 소중하겠지요.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면 우리가 일상에서 실랑이해 왔던 다른 모든 걱정과 고민들이 한없이 사소해집니다. 잡다한 문제들이 나를 오래 괴롭힌다면 되뇌어 보세요. '까짓 거,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그리고 더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거지요. 먹고, 마시고, 쉬고, 놀고, 일하고, 사랑하며 충실하게 삶을 만끽하는 것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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