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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에가는길 Aug 19. 2024

실패기

어느 대학생의 일기

5월 20일

답장하기 싫다. 전에 온 것도 아직 안 읽고 있는데 새로 또 보내와서 숨이 막혔다.

귀찮고 싫다. 감촉이 기분 나쁘고 끌어안는 것도 자꾸 예쁘다 귀엽다 하는 것도 싫다.

너는 행복하다고 했지? 내 연기에 속았나 아님 모르는 척하고 있나.

혹시 진짜 행복한 걸까, 그렇다면 부럽다.

나는 그냥 참고 있어. 모든 게 더 나아질 때까지.

안 만나고 싶다. 내가 왜 너에게 주말을 다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언제쯤 네가 좋아질까.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넌 어제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설고 정이 안 간다.

네 기쁨이 나한테도 기쁘고 네 슬픔이 나한테도 슬픈 그런 순간이 언젠간 올까?



6월 11일

기억해야 돼.

그애는 나를 좋아해 준다.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



6월 12일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 말 안 하면 그냥 별 것 아닌 일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말해서 심각한 문제가 되어버리는 걸지도.

조심스럽게 돌려 말하면 괜찮지 않을까. 넌 좋은 애고 잘하고 있는데 우리의 속도와 방식이 맞지 않는 거라고.

선택권을 주면 어떨까. 기다리거나 떠나거나 너 좋을 대로 해도 된다고.

그렇게 해서 끝나는 건 실패가 아니지 않을까. 혹은 좀 정상적인 실패이지 않을까.



6월 13일

방해되니까 연락 그만해. 나한테 이번 시험이 얼마나 중요한데.

내가 다 짜둔 계획에 네가 지금 방해된다고....

"공부 잘돼?" "화이팅" 같은 의미 없는 대화를 왜 주고받아야 하는 거야?

대화가 맨날 똑같잖아. "밥 먹었어?" "맛있게 먹어" "수업 중이야?" "난 이제 집에 가"

그런 게 너한텐 정말 즐거움을 주는 걸까?



6월 17일

나는 아마 너를 안 좋아하는 거겠지, 아주 조금도.

내가 왜 애먼 사람 괴롭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미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끝내려면 상처 줘야 할 거고 주변에 소문나는 것도 쪽팔리고.

그냥 뭘 하기도 귀찮아. 만나기도 귀찮고 헤어지는 것도 귀찮다.

솔직히 내가 진짜 병신 같아. 네가 짜증나고 귀찮아서 미안. 이런 여자친구가 세상에 어딨을까.



6월 20일

왜 기분이 안 좋지? 왜 기쁘지 않을까.

만점을 받지 못해서? 완벽한 남자친구가 아니라서?

충분히 좋은 성적이고 충분히 좋은 남자친구인데 나는 왜 기쁘지가 않을까.

공부도 연애도 하고 있는데 왜 내 인생은 더 좋아지지 않는 걸까.

실은 알고 있다. 아무것도 한 번에 좋아지지는 않는다는 걸.

그런데도 왜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쁜 걸까.



6월 29일

한 마디면 된다.

“나 할 말이 있어”. 그렇게 시작하면 된다.

재수하지 않겠다고 부모님에게 통보하던 때처럼, 오래 한 알바를 그만두던 것처럼,

일단 던져놓고 나면 상대의 당혹감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은 정리되기 시작할 거다.

날 귀찮게 하는 모든 것들을 남겨두고 도망칠 수 있다. 뭐든 이런 식으로 끝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내 인생에는 뭐가 남을까?

새로 채워 넣을 가치 있는 것들을 찾지도 못했으면서 왜 심술만 부리고 있을까.

그냥 빨리 일을 구하자. 다시 일이나 하자. 내가 볼 땐 그게 문제다.

어디 콕 박혀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돈을 쓰다 보면 뾰족하던 정신이 좀 뭉툭해질 거다.



7월 1일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이러는 거지만 지금으로선 널 상처주지 않는 것만이 나의 목표야.

한 가지만 다짐한다. 네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자고.

네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하더라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자고....



7월 3일

아무것도 확신이 없지만 그만하는 게 맞는 거겠지.

너는 좋은 사람 만나서 좋은 연애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이제 그만 스트레스받고 내 일상 다시 찾는 게 좋을 거고.

어쩌면 나도 더 잘 맞는 사람을 만나 평범한 연애를 하게 될 수도 있겠지....



7월 10일

왜 나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까.

왜 날 좋아해서 생기는 조금의 서투름도 다 견딜 수가 없는 걸까.

넌 피하기만 하는 여자친구를 왜 여태 기다렸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어?

왜 너는 됐고 나는 안 됐을까?



7월 16일

돌이키려면 얼마든지 돌이킬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다시 노력하면 다 괜찮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못 할 것 같다.



7월 23일

시간이 지나면 다 휘발되고 본질만 남겠지.

그땐 슬퍼하지 않고 네게 고마워만 할 거야.


어떤 말이든 받아들일 각오를 했는데 너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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