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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에가는길 Aug 26. 2024

검은 옷만 입어도 낭만은 있어요

어느 대학생의 일기


2020년 10월 8일 목요일,

낮엔 덥고 저녁엔 쌀쌀했다.



 사이버 강의만 내리 듣다 아주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사람이 많더라. 오랜만에 화장도 조금 했다. 기분 전환이 될 줄 알았는데 별로 효과가 없고 지울 때 귀찮기만 했다. 다음엔 안 해야지. 수업을 다 듣고 돌아오는 길에는 날이 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찬 공기가 나를 휩쓸고 갈 때 묘하게 설레는 감정이 훅 끼쳐왔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청춘의 향기. 대학은 내 청춘의 요람이다. 내 모든 낭만이 다 여기에 있다.


 갓 스무 살이 된 내게 대학 문턱을 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부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애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영혼이 해방되는 감각을.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열심히도 놀았다. 사람들 속을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며 재밌고도 쪽팔린 짓들을 쉴 새 없이 했다. 공부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은 해봤다. 그런 다음엔 휴학했다. 일 년 만에 돌아오니 교문이 닫혀 있었다. 전염병 때문에.


 동기들 중엔 졸업한 애들도 있고 군대 간 애들도 있다. 남아있는 애들도 전만큼 서로에게 시간을 맞춰 모여 다니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내 복학 생활은 꽤 조용하다. 그래도 나는 아직 교정에 가만히 서서 밤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몇 년 전의 흥분을 고스란히 불러 올 수가 있다. 여기서 보낸 밤들은 하나같이 빛났다. 별 대신 또래들의 웃음소리가 반짝거렸다.


 그런 곳이 바이러스로 이리도 황폐화되었다니. 새터는 개최할 엄두도 못 냈고 공연 동아리들의 화력도 다 죽었다는(사실 어떻게 잔존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소식은 진작에 접했다. 난 놀만큼 다 놀았고 앞으론 다시 그렇게 놀 생각이 없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요즘 입학하는 새내기들은 뭘 하고 놀까. 그래도 또 나름대로 만나고 노는 방법이 있겠지.


 아무튼 학교에 가서 설렘을 느낀 것까지는 좋았다. 아니, 그 다음까지도 좋았다. 집에 돌아와 좋아하는 돈가스 도시락을 렌지에 돌려 먹으니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또 머리 뚜껑을 열어야 했다. 그 안엔 오늘 수업 중에 들은 말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교수님은 색채가 사람의 마음에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강의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검은 옷만 입고 다니던 경직된 남학생이 있었는데 옷을 밝게 입기 시작하더니 성격이 부드러워지고 결혼도 했다"고.


 그 한 마디가 아직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유치한 항변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냥검은색 옷을 자주 입고 경직돼 있고 결혼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서 괜히 찔려서 그렇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도 언젠가는 밝은 옷을 입고 부드럽고 명랑한 사람으로 바뀌어서 결혼하고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런 뜻인 걸지도 모르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못내 섭섭하다. 엄마한테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싶다. 그 강의의 제목에는 '치료'가 들어간다. 치료. 멋지지만 무서운 말이다. 만약 내가 어떤 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아서 어떤 병증이 낫고 건강해진다면 이전의 아픈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달라진 나는 원래의 나보다 나은 나일까?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데에는 우리 엄마도 실패했다. 그래서 세상 어디에도 그런 애정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차라리 나의 일부를 감추고 뒤에서 혼자 도닥이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노랑 옷도 입고 주황 옷도 입는다.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경직된 남학생이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사무칠 이유도 없다. 그런데요 교수님, 저한테도 밤바람 한 줄기에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낭만이 있어요.......


 아무래도 검은 옷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속이 좁고 옹졸해 이러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조차 나다. 이런 점이 결혼 생활에는 나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로 사는 데에는 나쁠 것도 없다. 오늘도 평소처럼 감춰진 어느 부분을 두드려주고 있을 뿐이다. 저마다의 사는 방식이 있는 거겠지. 나 틀렸어?라고 묻지 않는다면 너 틀렸어,라는 말을 들을 일도 없을 거다. 궁금해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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