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원생의 일기
2023년 3월 9일 목요일
자정 되기 좀 전.
진행하고 있는 상담에 대해 수퍼비전을 받고 왔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받으면서는 참 부끄럽고 괴로웠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겸허해진다. 부끄러웠던 건 내가 많이 잘못된 길로 갔기 때문이고, 그게 내가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아 외면했던 결과였기 때문이고, 그걸 누가 적나라하게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괴로웠던 건 더 이상 그렇게 편하게 눈을 돌릴 수 없어졌기 때문이고, 앞으로는 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고, 내 이기심에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그 사람에게 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회기에 문제가 많았지만 슈퍼바이저는 날 꾸짖지 않았다. 내 잘못이라는 걸 나도 알고 그도 알지만 잘못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애처럼 혼날 시기는 지난, 스스로 값을 지불하고 수퍼비전을 받는 대학원생이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와서는 나이 지긋한 노교수들조차 우리에게 야, 너, 하지 않고 여러분들 선생님들 한다. 이래도 되나? 어른이 되기 위한 자격시험이라도 치러야 하지 않나? 나 같은 자격미달자들이 마구잡이로 성인이 되면 사회에 거대한 혼란이 야기되지 않을까?
이십 대도 중반을 훌쩍 넘겼고 대학원생 딱지까지 달고 나니 내가 잘못해도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는다. 내게 실망하고 나를 저평가하고 기회를 박탈할 순 있겠지만 구태여 꾸짖지는 않는다. 그러니 내가 내 잘못을 알아서 발견해야 한다. 스쳐 지나가는 듯한 말을 알아서 주워섬기며 스스로를 혼내야 한다. 해야 하는 일을 누가 억지로 시키지도 않는다. 늘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경기를 일으켜왔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솔직히 아무도 뭘 안 시킨다는 게 힘들다. 나 혼자 힘을 내서 해야 한다는 게.
늘 반항심이 넘치고 제 하고 싶은 것만 열심히 하는 애였다. 하기 싫은 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다가 누군가의 불호령이 떨어지고서야 마지못해 해치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능동적이고 자기 주도적으로 산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실은 누가 엉덩짝을 뻥 차 줘야 겨우 움직이는 극도로 수동적인 성장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상담이라는 일이 너무도 피로하고 막막하게 느껴졌다.
상담이란 내담자와 상담자 모두에게 익숙하고 쉬운 방식을 억지로 비틀어서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생채기를 만들고 그게 회복되는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난다. 상담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는 부분들을 일부러 찾아내서 고통과 갈등을 자초해야 한다. 내담자의 문제만 발견하는 게 아니다. 상담자인 나 자신의 문제는 더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야 한다. 모르려면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것들마저.
이 일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퍼바이저가 오늘 내게 상담하는 건 좀 재미있냐고 묻길래 재미없다고 했다. 선생님은 재미있으세요? 물으니 재밌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고 했다. 재밌을 때는 왜 재미있으세요? 하니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어서란다. 몹시 진솔해지는 순간이라나. 난 모르겠다. 나도 그런 데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나를 자꾸만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내가 심리학으로 도망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떨쳐낼 수 없다. 진짜 사랑하는 건 무서워서 내버려 두고, 얄팍하게 사람들 마음이나 읽어가면서 평생 아는 척하며 살고 싶었나. 아니면 내 모든 약점을 내가 먼저 다 꿰어서 남들은 모르게 숨기려는 요량이었나. 그런데 정말이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찾아 헤맨 끝에 도착한 곳에는 과연 낙원이 있을까? 삶이 사막이라 우리는 자꾸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