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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에가는길 Sep 16. 2024

거리의 영혼들

어느 대학원생의 일기


2021년 9월 1일, 오후 8시 31분.

대학원에 첫 등교를 한 날



 잠을 못 자서 피곤하지만 오늘로 생활 패턴을 바로잡기로 다짐했으니 참아보기로 했다.


 오늘은 첫 등교를 하는 날이었다. 수업은 아직 다 비대면인데 조교 일 때문에 가게 됐다. 교수가 첫 수업이니 참관해달라고 해서.... 말이 좋아 참관이지 그냥 불안하니까 같이 있어달라는 것이었다. 메일을 주고받는 동안 대충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예상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촐싹 맞다고 해야 하나, 호들갑스럽다고 해야 하나? 교수치고 젊긴 한데 그 나잇대 남자 치고도 무게감이 없는 편이었다. 호불호를 따지자면 일단 호.


 이 이야기로 시작하려던 게 아닌데.... 실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이 있다. 첫 등교일이다 보니 헤맬 걸 생각해서 오늘 아침엔 약간 일찍 출발했었다. 그럼에도 길치로서 다년간 축적해 온 헤매임과 길 잃음의 역사로 인해 못내 불안해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됐다. 그런데 가다 말고 어떤 고양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 언덕 바로 밑 자동차 아래에 웅크리고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삐약삐약 울었다. 날 부른 거다.


 동네 고양이들한테서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크기가 그 녀석의 반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새끼고양이들이나 낼 법한 소리. 놀라서 잠시 멈춰 선 사이 그 녀석은 나한테서 뭘 봤는지 더 거세게 울며 달려왔다. 맹렬하게 내게로 뛰어들더니 내 다리에 자기 몸을 비벼대면서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평생 같이 산 고양이한테서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격렬한 표현이었다. 입에서 왜 그래, 왜 그래하는 소리가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그 녀석은 나를 간절히 부르고 온몸으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다 큰 고양이 같았고 조금 꾀죄죄하긴 해도 붓기 없이 날씬했다. 얼굴은 조막만 했다. 누가 키우다가 버린 걸까? 머리통에 손을 뻗어 우리 고양이를 쓰다듬듯(실은 이 감각이 그새 희미해졌었다) 어루만지자 더욱 다급하게 몸을 들이밀었다. 내게 뭘 원하고 있는 걸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도망치듯 녀석을 떠났다. 마음이 급했다. 오늘은 첫 등교일이라 변수가 많을지도 몰랐다. 서둘러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면 희망고문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나를 겨우 몇 발짝 쫓아오다가 금방 멈춰 섰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서 걸었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놓곤 몇 시간이나 지난 후 집에 돌아오면서 그 자리를 다시 기웃거렸다. 당연히 없었다. 길 고양이들이 사방이 뻥 뚫린 길가에 몇 시간이나 계속 머무는 경우는 없다. 내가 그 골목을 지나다닌 것만 해도 십수 년이 됐는데 그 녀석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제 또다시 내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잘 있으려나. 오늘 뭐라도 좀 먹었을까. 녀석이 내게 어떠한 표현을 퍼부을 때 데리고 살까 하는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나는 아직 내 집조차 없다. 내 몇 안 되는 계획들이 틀어지는 것이 싫고 책임질 일을 늘리고 싶지도 않다. 전과 같은 죄책감과 불안에 다시 휩싸이게 되는 것도 사절이다.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 그치만 만약 오늘 돌아오는 길에 또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녀석이 나를 기다렸다면. 아무 사람에게나 달려든 것이 아니라 나를 고른 것이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시 만난대도 나는 똑같이 도망쳐야 할 거다. 그때는 더 마음이 안 좋겠지. 그래도 오늘처럼 급하지 않다면 할 말을 다 하도록 기다려줄 수 있을 텐데. 성큼성큼 걷는 나를 멀리서부터 불렀던 얼룩 고양이. 나를 스쳐 지나간 것들은 어디로 갈까. 그런 물음을 던지면 "어디선가 잘들 살고 있겠지"하는 메아리가 가슴속에서는 돌아오는데,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 거리의 영혼들. 내가 스쳐가고 나면 그대로 사라지는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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