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여대의 공학 반대시위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은유와 상징을 표현한다. 목수는 고요함으로 성자는 거룩한 자로 어린아이는 창조적 존재로 말이다. 하지만 때때로 목수는 환경파괴자로 성자는 사기꾼으로 어린아이는 골칫덩이로도 읽히게 된다. 이러한 간극은 독자의 삶에 있고 나아가 문화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젊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지독하게도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 은유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젊은이”는 그 자체로 잠재적인 무엇이 아니라 남성으로, 여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또한 누구는 한남으로 누구는 메갈리안으로 불리고 있는 데다 페미니즘의 목표였던 “평등”이 그들에게서 점점 요원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책임 있는 자는 진정한 평등의 가치를 회복시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덕여대를 포함하여 서울 내 여대에서 공학으로의 전환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한국을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 시위를 보고 있자면 그 과격함 때문에 무섭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명분이 “학교 설립 이념 수호” 뿐만은 아닌 것 같다.
2023년 6월 경. 학교 내 시설 관리의 미흡과 부주의 때문에 유아교육과의 한 학생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학교 측은 그 일 이후로 부랴부랴 보수했는데, 사실인 즉 학생들이 이미 수년간 위험을 알리는 민원을 제기했지만 그때까지 제대로 된 조치는 없었던 것이었다. 이를 미루어 보아 학생들의 목소리가 평소에도 무시당해 왔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단 며칠 만에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가 수년간 방치되어 온 것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그들의 시위는 어떤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학생들의 시위는 페미니즘 시위처럼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이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을 상승시키고 유리천장을 없애기까지 여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페미니즘의 이념을 내세웠을까? 이는 ‘왜 하필이면’ 이란 뉘앙스가 아니다. 내 짧은 사회경험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몇몇 대기업을 제외한 아직 많은 기업 오너들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남녀를 떠나 은근한 차별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여성 운동이 정녕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차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즉 요지는 이것이다. 차별이란 바로 구별에서부터 성립된 것은 아닐까? 또는 오직 구별만이 차별을 성립하게 한 것은 아닐까? 한 예로 가부장제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나누다가 이를 초과해 인간의 본성마저 구별함으로써 나타났다. 바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규정된 것이다. 아직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성별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이질적으로 느낀다. 바로 이 어떤 본능적인 이질감 때문에 아직도 차별이 만연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대학가의 여성 운동은 성을 정치적으로 구별하고 있다. “여성 인권을 위한”다는 말은 여성 인권이라는 정체성을 야기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어떤 거부감을 느낀다. 여성은 약자로 취급되고 남성은 사상적 거세를 강요받는다. 남성에겐 평등에 대한 관점이 ‘젠더’가 아니라 ‘양성’으로 제한된다. 이로써 남성에게 양성평등 개념은 “같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가 아니라 ‘양보’, ‘희생’ 또는 ‘기사도 정신’ 따위로 축소된다.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이러한 정치적 규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것이 바로 가부장제와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권력을 낳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젠더 트러블 서문 - 드래그 예시 참조>
진정한 평등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가능할까? 앞서 말했듯이 이념적 시위는 결코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며 오히려 또 다른 차별을 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이 의미가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숙고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누군가는 다름을 이해해 보는 가치로서가 아니라 그저 광기이고 따라서 이해란 사치요 낭비라고 규정해 버렸을지라도. 하지만 이를 단순히 다름이라 인정해서는 곤란할지도 모른다. 이해를 거부한다는 것은 “내가 너와 끝까지 대립할 것”이라는 선언과 다름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유감이지만 이해란 생각이란 범주 너머에서부터 온다. 동덕여대의 학생시위가 광기로 보이는 것은 질서 있는 도덕에 적응된 우리의 생각 너머에 무질서에 대한 공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위 자체는 인정하는 사람조차 그 방식만큼은 문제 삼는 것이다.
반면 이번 사태가 단지 학생시위대와 민중 사이의 갈등일 수는 없다. 또한 단순히 보편적 도덕성이 위협받는 상황이라고만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우리는 어째서 학생들이 그런 광기를 보이는지, 혹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따져 물어야 한다. 학교가 평소에 학생들을 존중해 왔으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왔는가? 학교가 평소에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진 않았는가? 더 나아가 이렇게도 물어야 한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어째서 외면받는 지경인가? 어른들은 그동안 어떤 잘못을 방치하고 묵인해 왔는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질문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문제에 대해 명료해질 것이다. 그런 명료함이 우리에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바로 이런 숙고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등으로 한걸음 내딛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