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by 고휘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시적 표현들과 상징들로 쓰여졌기에 결코 쉬이 읽히지 않는다. 그러한 글쓰기로 독자는 필연적으로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껏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한 시도를 거듭했지만 또 그만큼 실패해왔다. 위대한 사상가인 니체의 사유를 따라잡기란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것도 자기 자신에 영원히 이르지 못할 스스로와의 싸움이라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를 사유하는 한, 독자는 일시적으로나마 자기 자신에 대한 통상적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독서 가운데, 모든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또 물음의 대상이 ‘나’라는 존재에 가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묻는 것이 본능으로 자리잡은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삶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어떤 경험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지혜는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고향과 그 곳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10년이란 세월 동안 고독을 누리다 마침내 하산하기로 마음 먹는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그의 일대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잠시 생각해봐야할 것은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이다. 일각에서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건강한 인간이 노래하는 영원한 긍정의 노래”라 칭한 적이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는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길이다. 그러나 어떻게 긍정하는가? 또 긍정함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긍정이란 판단이 아닌 존재의 문제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긍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바로 그것이게 하는 힘’을 긍정한다는 뜻이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모든 존재자는 부정되지 않는다. 마치 심장 박동처럼. 피의 흐름, 근육의 수축과 이완처럼. 혹은 강의 흐름, 철새들의 이동, 주춧돌의 응축, 별의 운행처럼. 모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차원에서 그 무엇도 매개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이것이다: 긍정이란 곧 살아있음 그 자체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존재를 잘 포착하며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그림자일 뿐이다. 이 또한 생각이라면, 이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모사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 사유를 벗어날 때, 존재는 그 자체로 긍정된다. 존재는 더 이상 사유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