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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Apr 02. 2024

포켓커피 1. (잊지 않을 권리)

<단편소설> 결말은 자유

“경은 씨, 저 결혼해요…. 경은 씨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카톡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네 온라인 청첩장이 날아왔다. 썸네일엔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남자와 귀여운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다. 낯익은 듯 낯선 두 사람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성규민, 민예지의 결혼식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장소 : 양재동 스카이캐슬 웨딩 사파이어 홀
일시 : 2024년  5월 10일 금요일 저녁 7시


청첩장 링크를 누르니 두 사람의 웨딩포토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사진 하나, 하나 클릭해 들어가 그들의 표정, 그들의 의상, 그들의 머리, 그들의 화장을 정성스레 살폈다. 저 안에서부터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것은 내 얼굴 양쪽으로 퍼졌다. 뜨겁게 달궈진 얼굴을 식히려 냉동실 문을 열었다. 얼굴을 집어넣고 뜨거워진 열기를 식혔다. 그러다 2년 전에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그것을 발견했다. 그건 은정이가 나에게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이었다.


"슬플 때마다 이걸 하나씩 입에 넣고 오물거려 봐. 그러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니깐. 단쓴 카페인이 온몸으로 확 퍼지는 걸 느낄 거야. 자, 이거 너 주려고 내가 이탈리아에서부터 가져온 거야. 조심해, 따뜻한 곳에 두면 다  녹아버리니까."


나는 그걸 먹지도, 버리지도 못했다. 슬픔은 시시때때로 느꼈지만, 그걸 꺼내 입에 넣는 순간 슬픔이 가시기는커녕 더 깊어질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저걸 하나 꺼내 먹어야겠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그것도 아니면 허무함인지 알지 못하지만 이 열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면 내가 활활 타 재가 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5개씩 포장되어 있는 것 중에 하나를 꺼내 조심스레 껍질을 벗겼다. 네모모양의 초콜릿이 나왔다.  나는 그걸 입에 넣고 반을 깨물었다. 초콜릿 안에 있던 커피는 차가운 냉동고에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다디단 초콜릿을 혀 끝으로 느끼다 차갑게 얼어붙은 에스프레소의 쓴 맛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예상했던 대로 슬픔이 사라지는 것 대신 억울함이 나를 덮쳤다. 나는 그것을 와드득 와드득 씹었다. 진득한 초콜릿이 입안으로 퍼졌다. 목으로 번지는 텁텁함에 기침이 나왔다. 사래에 걸렸다. 기침을 하며 기도에 걸린 이물질을 뱉어냈다. 기침을 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 콧물과 침으로 범벅된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니가 어떻게.... 어떻게 감히.... 이제 겨우 2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카톡에 메시지를 썼다가 다시 지웠다.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까....

왜 나에게 이런 걸 보냈을까....

나보고 어쩌란 말일까....

축복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걸까? 정말로?

<2024년  5월 10일 금요일 저녁 7시>

나는 휴대폰 캘린더에 그날을 저장해 두었다.




은정이가 규민을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대학교에 갖 입학한 신입생을 이제 막 군대에서 제대한 복학생이 낙아 챈 것이었다. 당시엔 4살 오빠도 어마어마한 어른으로 느껴졌었다. 은정이는 아빠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규민으로부터 느꼈다고 했다. 은정이는 그걸 안정감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나는 그런 은정이에게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런 사랑 또한 존재하는 거라고 되받아쳤다.

우리는 줄곧 함께 만났다.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을 때는 커플 데이트를 했고, 남자친구와 헤어져 내가 혼자  일 때는 커플에 낀 상태로 데이트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은정이의 1+1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날 보며 다른 친구들은 눈치가 없다고 까대기 일수였다. 나 역시 눈치가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은정이와 규민은 괜찮다고만 했다. 내가 있어야 완성되는 퍼즐조각 같다면서....


은정이는 규민과 일찍 결혼하고 싶어 했다. 안정적인 사람과 안정적인 집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규민은 아니었다. 졸업이 우선이었고, 취업이 우선이었다. 취업을 한 후에는 신입사원이기 때문에 결혼하기 힘들었고, 대리를 단 후엔 전세금이라도 모아놓아야 했기에 결혼할 수 없었다.

은정이는 결혼식만 하지 않았을 뿐 결혼한 거나 다름없다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지만, 그 말을 할 때마다 은정이의 눈가에 비친 그늘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의 만남은 점점 더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은정이가 규민과 잠시 헤어진 적이 있었다. 그와 사귄 지 5년 만이었다. 그때 은정이는 모아놓은 돈을 탈탈 털어 피렌체로 떠났다. 사실은 대학 때부터 함께 돈을 모아서 피렌체로 배낭여행을 가자고 했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영화를 본 직후였으니, 그곳에는 사랑과 낭만이 충만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은정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공시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행은 나에게 사치였다. 그리고 은정이의 사랑놀음에도 점점 지쳐갔다.


은정이가 규민과 싸우고 나에게 연락할 때마다 나는 매번 같은 말을 했다. 왜  그 사람에게 그렇게 목을 매느냐고, 너 혼자서도 충분히 멋지게 살 수 있다고, 너를 좀 더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라고. 하지만 그때마다 은정이는 내 말을 무시했다. 세상에 남자는 많지만 규민은 한 명뿐이라고 말했다.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던 은정가 이번엔 정말로 헤어질 결심을 하고 떠난 곳이 피렌체였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돌아와 나에게 건넨 것이 바로 포켓커피였다. 조금이라도 피렌체의 감동을 나에게 전해주고 싶었다며 건넨 것이었다. 나는 그것의 정체가 의아했다. 포켓커피라고 했지만, 커피는 보이지 않고 초콜릿이었기 때문이다. 커피는 좋아하지만 초콜릿은 싫어했던 나는 그걸 바로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냉동고에 넣어둔 채 시간이 흘렀다.





페이스북에 5년 전 사진이 떴다. 거기엔 은정이와 규민 그리고 내가 있었다. 우리는 어느 지방의 장미축제에 가서 장미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때 내가 만난 사람이었던가? 그때 내가 누구를 만났었더라?


공시생이긴 했지만 연애를 쉬진 않았기에 분명 누군가를 만나긴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누구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사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질 때 온라인에 남아있는 사진과 핸드폰에 남아있는 사진을 모두 삭제했다. 이 사진은 아마도 찍어준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기에 삭제하지 않았었나 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은정이의 얼굴을 보며 "제발 나를 잊지 말아 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은정이가 죽도록 미웠지만 또 미워할 수많은 없었다. 은정이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공무원이 되어 민원인들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합격만 하면 모든 행복이 내 것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행복은 여전히 저 멀리 있는 것 같았다. 파랑새를 찾아 떠난 아이들처럼 나는 행복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독서모임에 나가고,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하다못해 온라인에 글까지 쓰며 내 행복이 숨어있는 곳을 삿삿이 찾아다녔다. 책 속의 파랑새는 집 마당에 있던데 나의 집엔 마당도 없었다. 그저 숨을 꼴딱꼴딱 쉬며 남들이 말하는 행복을 찾아 열심을 낼 뿐이었다. 그런 날 보며 은정이는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물었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데? 너도 이제 너를 위해서 좀 살아. 네 자신을 찾으란 말이야."

"난 이미 나인데 날 어디서 찾으라는 거야?"

"넌 널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잖아. 왜 그렇게 사랑을 갈구하느냐고. 규민이 그러는 건 다 너가 그래서 그래. 너가 그러면 그럴수록 질리는 거야."

"사랑이 식은 거랑, 질리는 거랑 똑같은 걸까?"

"또 사랑타령이야. 정신좀 차려.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돌아가는데 넌 맨날 사랑 타령이야?"

"세상에 사랑 빼면 뭐가 남는데? 난 사랑하려고 이 세상을 살아...."

"아니 남자 말고 네 자신을 사랑하라니까! love yourself 노래도 있잖아!!"



그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동안 은정이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은정이가 나에게 수없이 건넸던 메시지를 나는 왜 읽지 못했을까?




규민은 은정이가 자신을 버렸다고 했다. 자기를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다고 말했다. 그때 피렌체로 혼자 떠나더니 다시 돌아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른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고 했다.버려진 사람은 자신이기 때문에 원망은 있지만 미련은 없다고도 했다.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만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니, 헤어지고 나면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이런 내가 규민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오빠, 축하해요."



규민의 결혼식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은정이와의 시간도 있지만, 규민과의 시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정이가 모르는 나와 규민과의 일도 있었다. 은정이 때문에 힘들 때마다 규민은 나에게 연락을 했고, 상담을 해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베프의 베프인 셈이었다.


"금요일 저녁이라서.... 바쁘면 꼭 안 와도 돼고...."


꼭 가겠다는 답장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 규민의 생각은 나와  달랐던 모양이다. 내가 올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일까? 내가 자기 결혼식에 와서 깽판이라도 칠 줄 알았을까? 은정이의 사진이라도 들고 가서 싸대기를 날릴 줄 알았을까?

허탈함이 밀려왔다.


남아있던 포켓커피의 절반을 입에 넣었다. 실온에서 녹은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사라져 버린 은정이의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 서러웠다. 은정이는 이 세상에  없지만, 페이스북에는 여전히 은정이의 사진이 떠돌아다녔다.

그것이 마치 아직도 이생을 떠나지 못한 은정이의 모습 같아서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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