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 Mar 11. 2019

프랑스학교에서의 친구관계

방글라데시가 그립다는 아이

"엄마, 나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너도 친구 있잖아. 학교 친구들이랑 잘 못 노니?"

"아니, 한국 친구 말이야. 다카에서 처럼 말이야. 준영이랑 놀고 싶어. 준영이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랬구나......."

"맨날 집에만 있으니 너무 심심해. 한국 친구랑 놀고 싶어. 난 방글라데시에 다시 가고 싶어."

"어떡하지. 우린 다시 갈 수가 없는데.......

우리가 델리로 이사 가면 거기에서 좋은 한국 친구 만나기를 기도하자."

엄마의 말에 아이는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준영이 같은 친구를 만나게 해 주세요."



지안이는 생후 10개월에 방글라데시 땅을 밟았다. 100일 즈음에 떠났던 아빠를 8개월 만에 만나 비행기를 3번이나 타고 이틀에 걸쳐 방글라데시 치타공으로 갔다.

치타공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아이와 나는 하루 종일 집안에 머물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부르카를 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우리를 쳐다보는 무슬림 남자들의 눈빛이  끔찍하게 싫었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은 공포로 다가왔다. 남편과 함께가  아니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때는 그래도 아이가 어렸기에 친구가 필요 없었다. 그저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시기였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집안에 있어도 괜찮았다.  힘들고 외롭고 우울한 마음은 엄마인 나 혼자 감당하면 됐다.


지안이와 소은이는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방글라데시에서 보냈다. 소은이는 방글라데시에서 가졌고,  한국에서 낳아 90일에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그러니 방글라데시는 아이들에게 제2의 고향인 샘이다.


 검정 부르카도, 무슬림 사람들도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점점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릭샤를 타고 가면서 릭샤왈라의 하소연을 들어주었고, 일하는 아줌마들의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점점 무슬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다카에는 한국 아이들이 많다. 학교는 다르지만 한글학교와 한인교회에서 만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준영이는 가장 개구쟁이 친구였다. 소심하고 매사에 조심스러운 지안이와 적극적이고 매사에 장난스러운 준영이는 이상하게 잘 맞았다. 지안이는 준영이와 함께 있으면 개구쟁이가 되었고, 준영이는 지안이를 만나면 뛰지 않고 앉아서 레고놀이를 했다.  지안이는 일주일 내내 준영이를 만나는 금요일을 가장 기다렸다.(방글라데시 공식 휴일은 금요일이기에 금요일에 예배를 드렸다.)


지금 지안이에게는 방글라데시에서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친구와 즐거웠던 기억만 남아있다. 그리고 너무 그리워한다. 한국 보다도 방글라데시를 더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친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뭄바이에 처음 왔을 때 나 역시 몹시 외로웠다. 그런데 난 그 외로움이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외로운 그 시간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설거지를 가득 쌓아 놓고, 널브러진 잠자리를 치우지도 않고 책상에 앉았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허기진 배를 커피로 달래며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없어 일주일 내내 아무도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림과 글쓰기가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곳에 산지 7개월이 지난 지금은 친구도 생기고 아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물론 정들면 떠나게 되는 곳이 뭄바이 이기에 너무 큰 정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해 친구가 되면 정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는 법.

벌써부터 내가 떠나면 남게 될 친구들이 걱정된다.



엄마가 이렇게 글과 그림에 집중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 마음을 나누는 동안 아이는 점점 더 외로움이 쌓여가고 있었나 보다. 학교 친구는 학교 친구일 뿐, 그들과 마음과 마음을 나누기에는 언어의 장벽이 너무 컸다.  영어와 프렌치로 대화를 하긴 하지만 한계가 있는 듯 보였다.  더욱이 같은 반 남자아이 네 명 모두 프랑스 아이들이다 보니 혼자 동양인인 아이가 그들 틈에서 우정을 나누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것으로 보기에는 반 친구들과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아이 내면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한국말로 함께 장난치고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가 그리워 가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방글라데시가 그립다는 아이의 말이, 친구가 필요하다는 아이의 말이 미안함으로 얼룩져간다. 부모의 상황에 따라 친구와 이별해야 하고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하는 아이는 어떤 마음일까?



부모의 눈으로 봤을 때,  아이가 프랑스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얻게 되는 장점들이 많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런 장점들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단지 한국 친구가 없다는 것, 프렌치와 영어 두 개 다 공부해야 하기에 너무 힘들다고만 생각한다.

아이가 나중에 커서 프랑스 학교에 다녔다는 것이 좋았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힘들기만 했다고 생각할까?



 
며칠 전 개학 날, 지안이 반에서는 서로 어디로 여행을 갔다 왔다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이스튼이라는 친구가 어느 섬에서 돌멩이를 잔뜩 가지고 왔다. 반 친구들에게 하나씩 주겠다고 챙겨 온 것이었다.

"누구한테 먼저 주고 싶니? 이스튼 네가 주고 싶은 친구들 이름을 순서대로 말해보렴."

지안이는 이스튼과 친하게 지내는 뱁티스트나 옥썽스 이름이 제일 먼저 불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Jian, come~"

순간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이스튼이 건네준 돌멩이를 자랑스럽게 받아 들었다.




"엄마 나는 이스튼이 내 이름을 나중에 부를 줄 알았어. 그런데 내 이름을 제일 먼저 부르는 거야. 그다음이 옥썽쓰, 그다음이 뱁티스트였어."

"이스튼이 너를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나랑 친하기도 하지만 다른 애들을 더 좋아해."


아마도 다른 친구들은 이미 지안이를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장벽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함께 쉬는 시간마다 축구를 하며 다져진 우정이 피어나고 있는 것은 않을까?

단지 지안이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안이가 한국 친구뿐만 아니라 프랑스 학교의  반 친구와도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래본다.


이스튼이 준 돌맹이


작가의 이전글 프랑스 학교의 체육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