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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y 16. 2019

1980년 5월

Happy birthday to me


1980년. 5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로 모든 어린이와 부모님들이 행복하게 웃던 5월이었다. 날은 따뜻했고, 꽃은 피었다. 특히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게 피어 여기저기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5월의 광주.

딱 꼬집어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그런 날들 중 하나였던 날. 광주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저 대학생들이 매일 하던 데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광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생들이 걱정되어 시골에 살고 있는 C는  절대 돌아다니지 말라고, 절대

데모에 합류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모범생이었던 C의 동생들은 그 말을 잘 듣고 집 안에 콕 쳐 밖혀 지냈다.


5월 14일 광주.

L의 엄마는 산기를 느꼈다. 하지만 집 밖은 어수선하기만 하다. 너무 위험해 나가기가 무서웠다. 그런데 진통이 왔다. 첫째 아이를 친정에 맞기고 남편과 병원에 가기로 했다. 병원에 가는 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다녔고, 총을 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 날 L의 엄마는 겨우 병원에 도착해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20년 뒤,  L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 못 낳을 수도 있었대. 병원 가다 죽을 뻔했대.”

다행히 L은 태어났다.


5월 15일.

시골 학교 선생님 C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제자들에게 감사의 편지와 꽃을 받았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C는  동료 선생들과 함께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가 아들이기를, 부디 아들이기를, 제발 아들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5월 16일 전라도 어느 시골.

아기가 태어났다. C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달려 들어가 확인부터 했다. 없다. 이번에도 없다.

C는 절망했다.

왜 나는 아들을 못 낳는 것인가?

남들은 잘도 낳는 아들을 왜 나는 못 낳은 것인가?

C의 아내는 남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저 눈물이 흐른다. 그럼에도 내 아이이기에 아기를 가슴에 올려 젖을 물린다. 아기는 힘차게 엄마의 젖을 빤다.


C는 다시 한번 술을 마셨다. 취하도록 마셨다. 어제의 기분 좋았던 분위기와 기대, 설렘은 온대 간대

없다. 한숨과 자괴감, 우울함이 그를 뒤덮는다.

그리곤 어디론가 향한다.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C의 할아버지 묘소이다.

울컥한다. 눈물이 난다. C는 소리 높여 운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조금 울어도 될 터. 참고 있던 울음이 터졌다.

“왜 나는 아들도 몬 난다요. 왜? 왜 나는 이런다요.?”

할아버지를 원망해보지만 되돌릴 수 없다.


C는 집에 돌아갔지만 태어난 넷째 딸의 얼굴을 보기도 싫다. 아기의 울음소리도 싫다. 작은 집에 북적대는 식구들이 싫다. 도망가고 싶지만,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들이 너무 많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5월 18일 광주.

일이 터졌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총소리가 들린다. 대포가 길을 막고 있다. 어떤 이들은 거리로 달려 나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집안에 들어가 있다. C의 동생들은  다행히도 살아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일을 당했다.




15년 뒤. 5월의 광주.

광주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난, 최루탄의 냄새를 기억한다. 얼마나 맵고, 얼마나 눈이 아팠는지. 중학교가 하필 전남대학교 부속 중학교였다.

5월이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데모를 했고, 화염에 휩싸였다. 당시에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싸워대는지.

이제는 그들에게 감사하다.

그렇게 우리 대신 싸워줘서 고마웠다고, 지금 이렇게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당신들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2019년 5월 15일 저녁.

남편이 연락이 안 된다. 집에 거의 다 왔다고 했는데

오지 않는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덜컥 걱정이 된다. 다 큰 어른을 걱정하는 게 조금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연락이 안 되면 걱정이 앞선다. 


“띵동”

왔나 보다. 한 껏 잔소리를 퍼부어 줄 테다.

현관문을 열었다. 남편 얼굴은 보이지 않고 꽃이 보인다. 장미꽃 향이 번진다.

“뭐야?”

“응. 미리 샀어. 축하해.”

“아, 뭐야. 걱정했잖아. 고마워.”

얼마 만에 받아보는 꽃인지. 울컥, 눈물이 난다.

감동이다.


난 친구들에게 내 생일을 말하지 못했다.

5월은 가장 바쁜 달이면서 가장 슬픈 달이었다.

18일이 다가오면 광주는 항상 슬픈 과거를 되새겼다. 그리고 난 이틀 전에 태어났다. 다행히도 광주가 아닌 시골에서 태어났기에 살 수 있었다. 나보다 이틀 먼저 태어난 내 대학 동기는 정말 죽을 뻔했다고 한다.


난 내 생일 앞에서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당당하지 못했다.

부정당했던 나의 출생은 젊은 날의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가슴속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생일 축하해. 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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