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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0. 2019

내 출생의 비밀

내 과거로의 여행 #1


“니가 털을 비싸게 팔아서 니 동생이 아들인거여. 니가 털을 비싸게 팔았당께.”

‘난 동생에게 털을 판 적이 없는데 이 할머니, 노망이 드셨나……. 뭔 털을 비싸게 팔았다는 말이여’

눈만 꿈뻑거리고 있는 나에게 그 할머니는 한마디를 더 하셨다.

“아 그랑께, 느그 아부지가 니 낳고 또 딸이라고 을매나 울었는지 모른당께. 즈그 할배 묘똥에 가서 아주 그냥 술을 진탕 맥고는 나는 아들도 몬난다요, 나는 아들도 몬난다요, 하고 울었드란다. 아 그란디 니가 니 동생한테 털을 비싸게 팔아서 니 어매가 아들을 난겨…….”

이제 일곱살이 된 나에게 같은 동네 사는 노 할매가 던진 말이다. 그 노 할매는 우리 할아버지의 하나뿐인 누이로, 우리 할머니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시켰던 바로 그 분이다. 이 할매는 틈만 나면 할아버지도 없는 우리집으로 와서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그 전부터 이 소리를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일곱 살 때 처음으로 들었던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나의 첫 기억이 일곱 살이다.


내 이름 또한 사연이 있다.

언니들의 이름은 세진, 세연, 세정, 사촌언니 이름은 세경, 사촌 동생 이름은 세영인데 나만 “선량”이가 되었다. 모두들 돌림자인 “세상 세”를 넣어서 이름을 지었다.

계속 돌림자를 써서 예쁘게 이름을 지으니 계속 딸을 낳았다. 그래서 내 이름은 특이하게 “선량”이라고 지었다. 내 이름 조차도 나를 위한 이름이 아닌, 아들을 위한 이름이었다.

내 이름을 호적에 올릴 때 동사무소 직원이 “량”을 “양” 으로 올려버렸다. 그래서 난 집에서는 “선량아”, 사회생활 할 때는 “선양씨”로 불리웠다.

내가 털을 비싸게 팔았기 때문인지, 내 이름을 이렇게 지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내 동생은 남동생으로 태어났다.

다들 일곱 살이면 언덕 너머에 있는 옥강국민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녔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난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다. 언니들은 학교 가고, 엄마 아빠는 들로 일하러 가면 난 동생을 데리고 집에 있었다. 동생과 놀아주고, 동생을 재우고, 재우면서 노래도 불러주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2살 많던 누나는 동생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곤 했다.

7살의 난, 한글을 배우질 못했다. 그런데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의 국어 책을 줄줄 외우곤 했다. 작은방 벽에 삐뚤 빼뚤 한글을 쓰기도 하고, 언니의 국어책을 읽어 보기도 했다. 어떻게 한글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을 보고 둘째 언니가 토끼 눈을 하고 날 쳐다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출생은 그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아빠는 7남매의 장남이었다. 아빠보다 2살 아래 동생인 작은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둘이나 낳았는데, 이 집안의 장남인 아빠는 줄줄이 딸만 낳았으니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엄마는 큰언니, 작은언니를 낳고 얼마 안 되 셋째가 생겼었는데 한집에 우리 식구, 작은아버지 식구, 고모들까지……. 코딱지 만한 집에 식구들이 바글바글하여 도저히 셋째를 가졌다는 말을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조용히 병원에 다녀왔다고 한다. 왠지 그 아이가 아들이었을 것 같다고 했다. 엄마가 그 때 병원에 다녀오지 않고, 그 아기를 낳았다면 그리고 그 아기가 아들이었다면, 아마 나도 셋째언니도, 내 동생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https://unsplash.com/@sashafreemind



아빠는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다. 교육대학을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고등학교까지 나와서 몇 달 연수를 받으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아빠는 꽤 좋은 선생님이었다. 엄하고 무서웠지만 제자들을 사랑하고, 아낌없이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이었다. 엄마도 아빠가 가난한 집안의 장남에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지만, 국민학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시집을 왔다고 했다. 지금도 명절이면 이미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제자들이 70이 넘은 국민학교 선생님을 찾아 선물을 보내고 방문을 하는 것을 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선생님은 아니었나 보다.

아빠는 내가5살 정도 되었을 때 선생님을 그만두었다. 당시 국민학교에는 두 부류의 선생님이 있었다. 한 부류는 교육대학을 나온 정식 선생님이고 또 한 부류는 우리 아빠처럼 고등학교만 나와 몇 달 연수를 받은 부류의 선생님이었다. 아빠가 일하던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그 두 부류의 선생님들을 엄청 차별을 했다고 한다. 그 차별을 참고 참다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술을 진탕 마시고, 학교의 유리창을 다 깨부수고 아빠는 사표를 썼다. 그리고 시골로 들어와 농사를 시작했다.

아빠가 하는 일들은 그다지 잘 되지 않았다. 염소를 키우면 염소들이 산속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닭을 키우면 집에서 키우던 개가 닭을 잡아먹어 버렸다. 한 때는 소도 키우고 돼지도 여러 마리 키웠었다. 그래서 언니와 함께 소를 끌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곤 했다.

돼지가 새끼를 낳는 날이면 아빠는 초긴장을 하고 엄마 돼지를 돌보았다. 엄마 돼지는 한번 새끼를 낳으면 10마리씩 낳곤 했다. 막 태어난 새끼돼지는 그럭저럭 귀여웠다. 하지만 곧 뚱뚱한 돼지가 되어 온 몸에 진흙을 묻히고 뒹굴었다. 뒷무통에 있던 돼지 막사에는 항상 돼지가 바글거렸다. 그곳을 지나 다니다 보면 항상 돼지 똥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저녁 무렵이면 그곳에 가서 돼지 여물을 주곤 했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눈치를 봐야했던 난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아이였다. 아빠는 고된 농사일과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한 결과 때문에 항상 화가 쌓여 있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집에만 오면 화를 냈다. 그 화를 받아내는 대상은 항상 엄마와 우리들이었다.

용암을 토해내는 화산같은 아빠와 그런 아빠 곁에서 견뎌내느라 재가 되어가고 있는 엄마 사이에서 난 숨을 죽이고 살았다.

나의 그런 상태를 부모님도 알았는지 나를 크게 혼낸 적이 없었다. 부모님께 맞아 본 기억 조차도 없다.

어느 날 작은 방에 쇠로 된 나사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난 그게 뭔지 궁금했다. 아무 생각없이 그 나사를 전기 콘센트에 꽂아 보았다. 지지직, 전기가 통했다. 그리고 그 콘센트 위로 불꽃이 튀었다. 너무나 당황한 난, 내가 저지른 일을 모른척했다. 나중에 보니, 콘센트에 연결된 전기 선이 타 들어가 있었다. 부모님은 누가 그랬냐며 물어봤지만 난 너무 무서워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모른다고만 했다. 결국 그 콘센트와 전기줄을 교체하게 되었다. 하마터면 집에 불이 날 뻔한 사건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그랬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것일까? 그 뒤로 나의 호기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내 동생은 달랐다. 여느 시골 사내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다. 내가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할 때 동생은 포두면으로 태권도를 배우러 다녔다. 태권도장에 갔다가 거짓말하고 오락실 갔다 걸려서 실컷 매를 맞기도 했다. 동생은 그 나이에 맞게 천진난만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보다 2살 많던 언니는 꽤나 똑똑했다. 어디를 가나 당차고 똑 부러졌다. 모두들 언니를 좋아했다.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 모두 다 언니를 예뻐했다. 셋째언니는 내가 4학년 때 큰언니와 작은언니가 살고 있던 광주로 떠났다. 큰언니, 작은언니는 이미 시골을 떠나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곳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계셨다. 셋째언니가 떠난 집은 너무 썰렁했다. 집안일도, 밭일도 항상 함께 했었는데, 이제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했다. 동생은 여전히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다. 난 언니의 몫까지 엄마를 도와야 했다. 엄마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모른척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잘했다고,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방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엄마가 부르면 달려가 밭일을 돕고 하는 일들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남동생은 놀러 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학교에서도 “세정이 동생” 이라고 날 불렀었는데 더 이상 언니가 없었다. 언니 없이 내 스스로 해 나가야 하는게 조금 버거웠다. 언니가 있을 때는 언니가 하는 데로 따라 하면 됐었다. 난 많이 소심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였다. 넷째 딸, 세정이 동생, 귀한 아들을 데리고 온 막내 딸, 나에게 주어진 타이틀이었다.


어렸을 때, 집에 성경책이 하나 있었다. 막내 고모가 가져다 놓은 성경책이었다. 옆동네에 교회가 있었지만 거의 가지 않았다. 가끔 크리스마스때 가서 맛있는 과자를 먹고 오곤 했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지, 왜 기도를 하고 싶어 졌는지도 모른 채, 그냥 기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있던 성경책, 맨 앞장에 나온 주기도문을 외워서 밤마다 기도를 하고 잤다. 주기도문이 무엇인지도, 그 내용을 이해하지 도 못했던 11살 소녀는 그렇게 주님의 기도를 읊조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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