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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0. 2019

칭찬받고 싶은 아이

내 과거로의 여행 #2

국민학교 1학년이 되어 처음 초등학교에 간 날, 이미 다른 친구들은 같은 학교의 병설 유치원을 나온 아이들이었다. 처음 학교를 가게 되어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됐던 그 날, 내 짝이 된 현미라는 아이는 책상에 선을 그려 놓고 그 선을 못 넘어오게 했다. 말도 안 되게 내 쪽은 매우 좁게, 자기 쪽은 매우 넓게 선을 그려 놓았다. 화가 난 나는 선생님께 바로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 현미가 책상에 줄을 그어 놓고 넘어가지 못하게 해요.”

하지만 선생님은 아무런 조치를 해주지 않았다. 현미를 혼내지도 않았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 학교 첫날의 그 기억은 나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선생님과 현미는 이미 아는 사이였는지, 아니면 고자질한 내가 싫어서 그랬는지……. 별거 아닌 이 기억은 그 선생님이 날 싫어했다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난 스스로 한글도 알고, 읽을 수도 있고 쓸 수도 있었지만 선생님이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그 느낌 때문에 나의 8살 첫 학교 생활은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의 첫 학교 생활이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광주에서 살고 있던 사촌 언니가 왔다. 언니는 얼굴도 하얗고 너무 예뻤다. 손등은 부르터 있고, 얼굴은 햇빛에 타 검게 그을린 내 모습과 비교가 되었다. 공부도 잘해서 항상 1등을 하던 언니였다. 난 겨울방학 숙제를 다 하지 못한 상태였다. 글짓기나 시를 지어가야 했는데 시골에서 글짓기나 시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동시가 뭔 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내가 하나 지어줄까?”

“진짜? 응 언니.”

언니는 그 자리에서 동시를 하나 지어주었다. 난 언니가 지어 준 동시를 방학 숙제로 제출을 했다. 그 당시 시골 학교에서는 방학 숙제 중 잘 해온 학생들에게 상을 주곤 했다. 금상, 은상, 동상, 장려상, 이렇게 붙여 놓고 전시회를 했다. 그런데 사촌언니가 써 준 동시가 떡 하니 금상을 받고 전시가 되었다.

“우리 선량이가 동시 쓰는 재주가 있었네?”

“아, 네……”

“내일부터 학교 끝나고 잠깐 선생님 만나고 가. 알겠지?”

“그리고 오늘부터 동시를 하나씩 지어서 선생님한테 보여줘.”

“네.”

내가 지은 시가 아니라는 말을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의 그 칭찬에 난 취해가고 있었다. 그 동시가 정말 내가 지은 시라고 나조차도 믿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난 동시를 잘 쓴다고, 글짓기를 잘 한다고 최면을 걸었다.

포두면에서는 일년에 한 두 번 백일장 대회를 열었다. 그러면 각 시골 학교 대표로 뽑힌 몇몇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난 그 뒤로 여러 번 백일장 대회에 나가게 되었지만 번번히 상을 타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난 동시를 쓰는 재주가 없었다. 나 스스로도 나에게 속고 있었다. 정말 웃긴 것은 가장 큰 상을 받았던, 사촌언니가 대신 써준 그 시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5학년 가을, 그때도 포두면으로 백일장 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동시에 소질이 없다고 스스로 느낀 난, 그날은 동시 대신 산문을 썼다. 주제는 “절약”이었다. 절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약 2시간 동안 모눈종이 12장에 글을 썼다. 글을 다 쓴 후 제출하고 나올 때 뭔가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글로 최우수상을 탔다. 처음으로 내가 쓴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 그리고 전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앞으로 나가 상장과 상품을 받았다. 포두면에서 주최한 백일장 대회였기 때문에 다음에는 고흥군에서 주최하는 백일장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 뒤로 나는 글 쓰는 것이 좋아졌다.

“아이들은 자기가 잘하는 것에 더 관심이 생기고, 칭찬을 받으면 더 좋아하게 되는 거예요.”

어디에선가 들은 이 말은 나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 칭찬은 나를 살아가게 하는 햇빛이고 물이었다. 칭찬은 내 꿈을 결정하는 나침반이었다. 그 뒤로 내 꿈은 작가가 되었다.

아빠는 내가 상장을 받아온 그 날, 모눈종이를 나에게 주시며 말했다.

“어떻게 썼길래 최우수상을 받았는지 어디 한번 똑같이 써봐라.”

“지금요?”

“그래, 지금. 다 써서 아빠 보여줘.”

“네…….”

항상 어리숙하고 어리버리한 넷째딸이 상을 받아오니 내용이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난 아빠가 내민 모눈종이에 내가 썼던 그 글을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중간 중간 말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똑같았다. 그렇게 또 한번 모눈종이12장의 글을 썼다. 세 달 전에 쓴 글이었지만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모눈종이 12장에 써 내려간 글을 읽어 본 아빠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와, 우리 선량이 진짜 잘 썼내. 그래서 최우수상을 탔구나. 정말 잘했다.”

아마도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런 종류의 칭찬이었을까?

“그래. 잘했다.”

그냥 짧게 끝나는 담백한 칭찬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난 엄마, 아빠한테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난 부모님이 시키는 일에 거의 복종하다시피 했다. 밭일도, 논일도, 산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도 엄마 아빠가 시키는 일이면 불평없이 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시골의 일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아빠는 “닥 나무”라는 나무로 사업을 했다. 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나무이다.

어느 봄 날, 닥나무 모종을 사와서 심었다. 1년 내내 애지중지 그 나무들을 키운다. 그 나무들이 어느 정도 자라 꽃을 피우고 씨를 맺으면 그 씨를 잘 모아둔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 그 씨를 잘 심고 싹을 틔운다. 어느 정도 자라 묘목이 되면 다시 밭에 심는다. 이러기를 여러 번 하니 100평쯤 되는 밭이 닥나무로 가득해졌다.

겨울이 되면 나무가 어른 키만큼 자랐다. 그러면 그 나무를 베어낸다. 베어낸 나무들을 한 대 모아 닥나무 전용 솥에 삶는다. 그 솥은 아빠가 벽돌과 흙으로 만든 엄청나게 큰 솥이다. 닥나무를 삶는 과정은 참 고단하다. 불이 꺼지지 않게 땔감을 계속 적당히 넣어줘야 한다. 너무 삶아져서도 안되고 덜 삶아 져서도 안된다. 잘 삶아진 때는 바로 닥나무 껍질이 잘 벗겨질 만큼이다.

닥나무가 잘 삶아지면 이제 조금씩 꺼내서 껍질을 벗겨 낸다. 닥나무 가장 중앙에 위치한 단단한 심과 나무껍질이 분리되는 과정이다. 이때는 힘이 많이 필요하다. 나무에서 껍질을 벗겨낼 때는 동네 어른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벗겨내곤 했다. 가끔 덜 삶아진 나무의 껍질은 정말 벗겨 내기가 힘들었다. 그 일을 하고 나면 팔과 손목, 허리가 아팠다. 나무에서 나무껍질을 벗겨내면, 벗겨진 나무 껍질을 한데 모은다. 이제 아낙내들의 작업이 남았다. 닥나무의 맨 바깥 껍질, 갈색의 표피를 분리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다. 발로 하는 재봉틀처럼 생긴 기계가 있다. 의자에 앉아서 발로 페달을 살살 밟으면 윗부분의 칼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 그 칼날 사이로 닥나무 껍질을 넣고 앞으로 뒤로 잡아당기며 표피를 벗겨낸다. 그러면 새하얀 진피가 나온다. 동네 아줌마들과 모여 그 작업을 했다. 표피까지 제거된 나무는 이제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약간 삼배 같은 모습이 된다. 이제 그걸 잘 말려야 한다. 아줌마들이 잘 벗겨낸 새하얀 닥나무 껍질을 수레에 싫고 바람이 잘 부는 언덕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빨래 널 듯이 하나하나 잘 널어주어야 한다. 하루정도 널어놓고 잘 마르면 거두어서 차곡차곡 저장을 한다. 겨울방학이면 어김없이 이 일을 했다. 이 일은 거의 한달 동안 계속 해야 했다. 엄마는 일꾼들 간식, 점심밥, 커피 등을 챙겼다. 난 설거지도 했다가, 간식을 나눠 드리기도 했다가, 같이 닥나무도 벗겼다가, 닥 껍질을 널고, 마르면 걷고 하는 일들을 했다. 나의 언니들도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 그 일을 했었다. 그 일은 새벽 6시부터 시작되어 밤 늦게까지 계속되곤 했다. 허리가 몹시도 아팠다. 엄마에게 허리가 아프다고 말하면 엄마는,

“어린 것이 무슨 허리가 아파.” 라고 했다. 그런데 난 정말 허리가 너무 아팠다.

잘 말려서 저장해 놓은 닥나무 껍질은 일본으로 수출을 했다. 그것으로 종이를 만들고, 종이돈도 만든다고 했다.

내가 5학년 때 즈음, 점점 수출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일본사람들이 더 이상 사지 않고 직접 닥나무 재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에 저장해 놓은 닥나무 껍질은 창고에 한 가득 쌓여 있었다. 여름이 되도록 일본상인은 우리 것을 사 가지 않았다. 그리고 새하얀 닥나무 껍질에 검은 곰팡이가 피었다.

어느 무더웠던 여름 날이었다. 난 학교에서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량아, 선량아.”

엄마의 목소리였다. 안 들리는 척 그냥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선량아, 선량아.”

엄마의 날 부르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어쩔 수 없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저 건너 냇가에서 목이 터져라 날 부르고 있었다. 책가방을 집에 두고 엄마가 있는 냇가로 향했다. 천천히 천천히, 그다지 경쾌하지 않은 걸음이다. 가기 싫어도 엄마가 부르면 가야한다. 하기 싫어도 엄마가 시키는 일이면 해야 한다. 그게 내 존재 이유였다.

엄마는 냇가에서 곰팡이 핀 닥나무 껍질을 씻고 있었다. 말없이 엄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닥나무 껍질을 씻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는 학교 남자 아이들이 수영하며 놀고 있었다.

그 닥나무를 팔 수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버렸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닥나무는 창고에 쌓여 있었다.

아빠는 더 이상 닥나무가 돈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자농사를 시작했다. 그 것을 위해 신작로 옆에 있는 산을 샀다. 그리고 그 산의 중턱에 유자나무 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산에는 돌이 너무 많았다. 아직 추위가 남아있던 어느 봄날, 아빠는 셋째언니와 나에게 그 돌산의 돌을 골라내는 일을 시켰다. 땅속에 박힌 돌을 찾아 바구니에 담았다. 그냥 땅 위에 있는 돌은 그나마 골라 내기 쉬웠다. 문제는 땅 속에 박힌 돌이었다. 그런 돌을 빼내려면 힘이 많이 들어갔다. 그 작업은 아침부터 해 질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일이 많이 힘들었지만 하기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빠가 시키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언니와 함께 여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몸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 똑바로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전 수업만 하고 조퇴를 해 집에 가서 누워있었다. 아빠가 논에서 일을 하다 잠시 집에 들렸는데 방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마디 했다.

“머리 그거 조금 아프다고 조퇴를 해? 얼른 다시 학교로 가라.”

난, 걸을 힘도 없었지만 아빠의 말에 다시 일어나 학교로 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난 일어나지 못했다. 세상이 뱅글뱅글 돌았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열이 펄펄 났다. 코에서 갑자기 뜨거운 것이 흘러나왔다. 코피였다. 갑자기 터져 나온 피로 베개가 빨갛게 물들어 갔다. 내가 자고 있는건지, 그냥 누워있는건지, 비몽사몽의 시간을 보냈다. 몇일이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는 날들이었다. 그리곤 온 몸에 발진이 생겼다. 홍역에 걸린 것이었다. 거의 1주일을 누워서 지냈다.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날 위해 가게에서 비싼 베지밀을 사왔다.

“우와, 베지밀이다. 누나 나 이거 먹어도 되?”

“몰라. 그냥 먹든지.”

“나 베지밀 좋아하는데.”

동생은 생전 없던 베지밀을 보고는 냉큼 마시기 시작했다.

“누나 아파서 사온 걸 니가 왜 먹어?”

“어? 그냥 있길래 먹은 건데……”

“누나가 밥도 못 먹고 누워 있어서 사온 건데, 생각이 있냐, 없냐? 이놈의 시키.”

“아, 알았어. 안 먹을게.”

동생에게 화를 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내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나를 위해 베지밀을 사왔다는 그 말이, “선량아, 엄마는 너를 사랑해.” 내 귓가엔 이렇게 들렸다.

엄마는 너무 아픈 날 위해 한약을 지어 왔다. 하지만 난 한약을 삼키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약을 잘 못 먹었다. 알약도, 가루약도, 물약도, 한약도 난 삼키지 못했다. 가루약, 물약, 한약을 삼키다 더 심하게 구역질을 하고 다 토해내곤 했다. 알약은 삼키다 목에 붙어버렸다. 그래도 엄마가 지어 온 한약은 다 먹어야 했다. 난 한약을 먹는 척하며 몰래 버리곤 했다.

“저기, 이거 한약 먹어주면 내가 베지밀 먹게 해 줄게…….”

“에이 그러다 엄마한테 또 혼나라고? 싫어.”

“누나가 말 안 할게. 나 도저히 못 먹겠어.”

“무슨 약을 못 먹고 그래.”

“먹으면 다 토할 것 같아. 그냥 버리기도 아깝고…….”

“알겠어. 엄마한텐 비밀이다.”

“응. 비밀로 할게. 고맙다 동생아.”

“윽, 쓰다. 이제 베지밀 줘.”

“알았어. 고맙다.”

동생은 그게 무슨 약인지도 모른 채 쓰디쓴 한약을 꿀꺽꿀꺽 마셔주었다.

아빠는 밥을 전혀 먹지 못하는 날 위해 뒷산에서 꿩을 한 마리 잡아왔다. 꿩고기를 먹으면 기력이 회복된다는 말을 들었나 보다. 아빠가 잡아온 꿩으로 엄마는 꿩 백숙을 해 주었다. 꿩 고기 덕분이었는지, 홍역이 나를 떠날 때가 되어서 인지 난 일주일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골에서 이런 저런 농사를 지어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는 일이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아빠가 한번도 생활비를 제대로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70이 넘은 지금까지도 엄마는 밭에다 여러가지 채소를 심어서 그걸 팔아 용돈과 생활비를 하고 있다.

힘든 가정형편이었는데 어느 날 아빠가 책을 사 왔다. 한두권이 아닌 여러가지 명작동화를 어떻게 사 온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단지 그 책 읽는 것이 너무 좋았다. 집에 오면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었다. 아직도 그 때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 머리속에 떠오르곤 한다. 특히 괴도 루팡 이야기는 어린 나이에 처음 읽어본 추리소설이었다. 아마도 아빠는 아들을 위해 책을 사 온 듯하다. 덕분에 난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며 나 혼자만의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by so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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