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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0. 2019

13살 소녀, 시골을 떠나 도시로

내 과거로의 여행 #3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던 그 해 봄, 13살이 된 나와 11살이 된 남동생은 부모님을 떠나 언니들이 살고 있던 도시로 가게 되었다.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은 갑자기 일어났다. 나와 남동생이 도시로 가기 전, 엄마는 아빠에게 말했다.

“선량이는 안 보내면 안 되겄소?”

엄마의 나이가 40 중반일때, 엄마는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도시로 보내게 되었다. 이제 시골의 밭일도, 논일도, 청소도, 빨래도, 모든 집안일도 엄마 몫이 되어버렸다. 우리를 올려 보내는 엄마의 심정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하지만 13살의 난 떠나고 싶었다. 더 이상 일을 하고싶지가 않았다. 불같은 아빠와 같이 살기가 싫었다. 엄마의 저 말을 듣고 혹시나 나만 여기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난 또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도 가고 싶어요. 언니들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너무 힘들어요.”

결국 나와 남동생은 시골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광주에서 언니들과 할머니, 할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큰언니는 졸지에 가장이 되어버렸다. 나와 동생이 광주집으로 들어오던 그 날, 엄마는 큰언니에게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엄마 대신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큰딸에게 보내는 엄마의 절절한 미안함이 아니었을까…….

난 토요일마다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에 내려갔다. 가서 엄마의 밭일을 도와 주기도 하고 친구들도 만났다. 주말에 시골에 가면 엄마가 평소에 한번도 해주지 않던 통닭을 해주었다. 그 통닭이 어찌나 맛있던지……….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시골소녀는 도시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 졌다. 도시의 초등학교는 엄청 컸다. 시골학교에서는 한 학년에 고작 13명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도시에서 처음으로 다니게 된 6학년 9반은 50명이었다. 그리고 6학년만 15개의 반이 있었다. 아빠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그 길을 일부러 큰길로 가르쳐 주었다. 큰 길을 따라 학교로 가려면 동네를 한바퀴 빙 돌아 가야해서 시간이 배로 걸렸다. 길도 잘 모르고 무서웠던 난, 6개월 동안 아빠가 가르쳐 준 큰길로만 다녔다. 다른 지름길이 있었는데도 왠지 무서웠다. 그 큰 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에게 큰 용기가 필요했다.

광주집은 3층 건물의 상가에 있었다. 2층에는 작은 아버지의 한의원이 있었고, 우리는 3층에 위치한 방 두 칸 집에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작은 방 하나를 쓰고, 언니들과 나, 동생까지 이렇게 우리 다섯은 한 방에서 서로 몸을 부대끼며 살았다.

할아버지는 꽤나 무서우신 분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너무나 좋았다.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화도 잘 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무서운 할아버지 옆에서 일을 도왔다. 할아버지는 여기 저기에 약초를 구하러 다녔다. 한의사는 아니었지만 한의학을 공부한 사람이라서 아는 사람들에게 한약을 지어 주고 침을 놓는 일을 했다. 겨울이면 경옥고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큰언니는 조무사 자격증을 따서 2층 작은 아버지의 한의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광주에 올라왔을 때 둘째언니는 고3이었다. 그리고 셋째언니는 중2였다. 고3언니와 중2언니는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서로 벽에 붙어 자겠다고 싸우고, 셋째 언니가 둘째 언니에게 말 함부로 한다고 싸우고, 옷 서로 입겠다고 싸웠다. 언니들 사이에서 난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난 언니들과 사는게 너무 좋았다. 집안일을 좀 하면 언니는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둘째언니는 날 항상 안쓰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날 잘 데리고 다녔다. 언니네 학교로, 도서관으로 데리고 다녔다. 한번씩 근처 5일장에 가서 옷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었다. 언니들과 사는 것이 행복했다.

큰언니는 날마다 성경 암송 카드를 들고 다니며 성경말씀을 외우고 다녔는데 난 그런 큰언니를 따라서 성경구절을 외우곤 했다. 그 때 따라 외웠던 성경구절들이 여전히 잊혀 지지 않고 기억이 나는 것이 참 신기하다. 지금은 아무리 외우려고 노력해도 뒤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

중2였던 셋째 언니를 따라 도서관을 다녔다. 주로 갔던 곳은 무등 도서관이었다. 6학년이었던 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시험기간이면 밤에 자지 않고 공부를 했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엄마, 아빠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초등학교를 1년 다닌 후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서도 여전히 착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감이 없는 아이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으나 워낙 기초가 없다 보니 영어나 수학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차츰 사춘기가 된 난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점점 더 자신감이 없어졌다. 내 외모, 내 환경 등에 불만이 쌓였지만 표현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탈을 꿈꿨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돈이 없었다. 겨우 버스비만 들고 학교를 다녔다. 친구들과 분식집이 너무 가고 싶어서 가끔 할머니나 큰언니에게 문제집 산다며 거짓말을 하곤 했다. 문제집을 사긴 샀다. 하지만 남은 돈을 돌려 주진 않았다.

엄마, 아빠는 우리들의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한달에 한번씩 쌀과 물, 여러가지 먹을 것들을 트럭에 한가득 싫고 왔다. 그러면 그것들을 1층에서부터 3층까지 들고 올라가야 했다. 아빠가 한번씩 오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쌀 한 가마니, 물 20리터를 들고 올라가는 그 계단이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겹게 느껴지곤 했다.

학교가는 길 아침마다 배가 아팠다. 학교도 재미가 없었다. 수업시간이 그냥 싫었다. 하지만 참고 다녀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주어진 환경에 수긍하며 살아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어느 날 둘째언니가 세계명작전집을 사왔다. 무려 20권이 넘는 전집이었는데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빽빽이 적인 책들이었다. 그 책에는 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영화화된 소설책이었는데 그 영화의 장면 장면들이 글과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난 언니가 사온 그 책을 한 권씩 읽기 시작했다. 제인 에어, 레미제라블, 1984, 두 도시 이야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유명한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제제가 꼭 나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내가 제제가 된 것처럼 상상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책은 내 인생 최고의 책이 되었다.

한번씩 큰언니는 우리들을 데리고 광주 시내에 가서 돈가스를 사주었다. 넓은 접시에 두툼하게 올려진 돈가스를 칼로 썰어서 한입 먹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그 돈가스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15살이 되던 해, 작은아버지가 한의원을 확장이전 하면서 우리도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그 집은 아파트였다. 아파트 바로 앞에는 아주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다. 가건물로 지어진 매우 작은 교회였다. 왜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어 졌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요일 아침, 발걸음이 그 교회로 향했다. 난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에 참석을 했다. 다들 처음 보는 학생이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난 교회 구석에 있는 바퀴벌레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다음주부터 중등부에 등록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교회에 무슨 용기로 걸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생애 첫 일탈이었다. 나의 가장 큰 용기였다.



어느 날부터 주말이면 시골에 가지 않고 교회를 갔다. 가방을 메고 공부하러 가는 척하며 교회를 갔다. 그곳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곳이었다. 내가 다니던 ‘오치중앙교회’는 매우 작은 교회였다. 성도 수도 매우 적었다. 중고등부 다 해서 20명도 안 되는 수였다. 그 교회의 정종득 목사님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뒤늦게 신학을 해 어렵게 교회를 개척한 분이었다. 그 교회에 다니면서 너무 행복했다. 다른 곳에서 받아보지 못한 따뜻함과 사랑을 느꼈다. 특히 목사님과 사모님은 날 너무 예뻐해 주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찬양을 알게 되었다.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노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한번 들은 찬양은 바로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심지어 화음을 넣어서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찬양을 잘한다며 칭찬을 들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내 꿈은 가스펠 가수로 바뀌게 되었다. 한참 ccm 가수들이 많을 때였다. ccm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나도 저렇게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찬양단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너무너무 하고싶어서 몇 날 몇일을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신청하지 못했다. 하고싶다는 생각만 간절했을 뿐, 자신감이 없었다. 결국 ccm 가수의 꿈도 접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학교나 집에서 와는 다른 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앞에 나가 찬양을 하고, 대표 기도를 하고, 중고등부 회장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느 날 아빠가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가 너희들 공부하라고 올려 보내 놨더니 교회를 다녀? 교회 다니면 헌금이나 내라하고 돈만 내라고 하는 곳인지 아빠가 모를 줄 알아? 엄마 아빠는 쎄가 빠지게 일해서 느그들 공부하라고 이 고생을 하고 살고 있구만. 뭐 교회? 한번만 더 가봐라. 공부나 해. 공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집보다 교회가 더 좋다고 말 할 수가 없었다. 가족들보다 교회사람들이 나를 더 인정해 준다고 말 할 수가 없었다.

난 계속 부모님을 속이고 교회를 갔다. 학교 끝나고 교회에 잠시 들러 기도를 하고 집으로 왔다.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살았다. 그곳은 내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이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었고, 조건없이 사랑해주는 곳이었다.

“하나님, 저희 부모님도 교회를 다니게 해주세요. 우리 부모님을 만나주세요.

하나님, 저 공부 잘하고 싶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저 교회 다니는 거 뭐라고 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 길을 인도해 주세요. 제가 어른이 되어서 어떤 삶을 살지 모르겠어요. 항상 저와 함께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내 기도는 날마다 같은 내용이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 마다 뜨거운 눈물이 흐르곤 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서러움도 아니고 원망의 눈물도 아니었다. 나를 허락해준, 나를 인정해준 그곳이 너무나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하루 하루를 버티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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